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10: 영어도 못 하는 목사가 미국인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편집자 주: 김응선 목사가 타인종목회에 첫발을 디딘 목회자들에게 보내는 갈팡질팡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시리즈의 열 번째로, 영어를 못해도 노력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은 이야기다.)

김응선 목사가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 한 교인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김응선 목사가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 한 교인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것 같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미국인 회중을 17년 동안이나 섬겼던 난 영어를 못한다. 이 시리즈 첫 편에서 자세히 언급했지만, 나의 영어는 참 짧다. 그래서 난 나 자신의 영어 실력을 ’500단어 영어’라고 뻔뻔하게 표현한다.

난 1993년 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 연회에서 집사목사로 안수를 받고, 1995년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아 정회원이 되었다.

당시 나의 첫 파송을 앞두고 여러 감리사들과 미팅을 하면서 난 영어 실력이 없으니 미국인 교회로 파송해달라고 요청했다. 나의 요청이 너무나 황당해서 당시 북일리노이 연회를 주재하시던 듀커 감독님은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 요청은 매우 현실적인 요청이었는데 우선, 한국 교회에서는 영어를 잘하는 1.5세 또는 2세 목사를 부목사로 두기를 원했기 때문에 내가 가서 섬길 수 있는 교회는 없었다. 굳이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내가 성인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접점이 많고 같이 부대끼면서 해야 하는 2세 사역에 문화적으로나 영어 실력으로나 솔직히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파송 받은 교회가 북일리노이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탐슨 연합감리교회와 아고페이 연합감리교회 두 교회였다.

나는 나와 같이 형편없는 영어를 구사하는 목사를 받아준 그 교회들이 너무 감사하며 목회하던 중 파송 받은 지 만 3년째가 되어가는 1996년 초, 북일리노이 연회의 듀커 감독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당시 내가 섬기던 두 교회 중 하나인 아고페이 교회가 1995년 한 해 동안 새로운 교인도, 세례도 없었으니 그 이유를 설명하고 목회 계획을 감독님께 직접 설명하라는 내용이었다.

아고페이 교회는 탐슨에서 3마일 떨어진 교회로 노인들이 적은 액수이지만 선교분담금(apportionment)는 늘 100퍼센트를 냈고, 늘 예배 출석 인원이 12명이어서 내가 한 다스(one dozen) 교회라고도 불렀다. 그 지역의 어린이들이 있는 젊은 가정은 탐슨 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에, 그 교회에 세례나 새 교인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튼 나는 내가 섬기던 두 교회의 사역 자료를 정리해서 감독님께 보낸 후 약속된 시간에 연회 사무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당시 중북부 선교감리사인 박이섭 목사님과 엘진 지역 감리사인 권덕규 목사님이 감독님과 회의를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그때 나를 본 듀커 감독님이 두 목사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

“지난 한 해 우리 연회에서 누가 성인 세례를 가장 많이 줬는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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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는 그들에게 감독님은 “김응선 목사입니다.(Thomas Kim did.)"라고 말했다.

이 말은 들은 나도, 두 선배 목사님도 어리둥절했다. 아마도 나처럼 작은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연회에 속한 쟁쟁한 대형교회를 제치고 성인 세례를 가장 많이 줬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그 상황을 이해하려면 조금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1993년 내가 파송되어 부임할 당시 탐슨교회는 성인 예배 출석자가 평균 30여 명에 불과했지만, 탐슨교회의 교회학교는 어느 교회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활발했고, 출석자도 유아반에서 고등부까지 90여 명에 달했다. 문제는 부모들이 아이를 교회학교에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려가고, 정작 당사자들은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주일학교 교사들조차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개렛 신학대학원 시절, 김영일 교수님이 자신의 백인 회중 경험담을 말하면서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서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가진 은사도 능력도 별로 없는데 음악의 은사마저 없던 터라 어린이 합창단을 만든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고민 끝에 교회학교 교사회와 만나 한 달에 한 번씩 마지막 주일에 교회학교 특송을 부탁하고, 교회학교 교사들은 교회학교 아이들을 네 단위로 나누어서 돌아가며 3달에 한 번씩 특송을 하게 했고, 연말에는 교사들도 특송을 하기로 했다.

탐슨 연합감리교회 교회학교 1-12학년 학생들과 교사들, 사진 제공, 탐슨 연합감리교회.탐슨 연합감리교회 교회학교 1-12학년 학생들과 교사들, 사진 제공, 탐슨 연합감리교회.

재미있는 사실은 아이들이 특송하는 주일에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들뿐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 심지어 친척들까지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 년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던 사람들이 몇 차례씩 주일예배에 참석하더니, 교인으로 등록하는 사람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 중에는 자신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자녀에게만큼은 세례를 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있는 다른 두 교회가 유아세례를 주지 않다 보니, 유아세례를 원하는 부모들은 말도 서툴고, 억양도 거센 한국인 목사가 섬기는 연합감리교회인 탐슨교회로 찾아왔다.

유아세례를 집례할 때마다 세례교육(Baptismal counseling)도 했다. 신학적 깊이가 없고 영어도 유창하지 못한 나는 유아세례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서(God’s Hallmark)’라고 설명해주었다. 금만 99.99%라고 홀마크를 찍는 것이 아니라, 유아세례는 아이가 하나님이 아끼는 자녀임을 인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미국 베이비부머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어려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유아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유아세례 교육을 받던 부모들 중 자기도 세례를 받고 싶다고 요청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인 교회의 특성상 특히 연합감리교회에서는 대부분 유아 세례를 받기 때문에, 유아 세례를 받을 기회를 놓치면 성인이 되어서도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고 입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세례를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도 세례교육과 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었다.

1995년에만 탐슨교회에서 18명이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고, 4년 동안 성인 세례를 통한 신입 교인만 무려 38명이 되었다.

1992년 당시 탐슨 연합감리교회의 기록을 보면, 예배 출석이 평균 34명이었는데, 1997년 내가 새로운 곳으로 파송 받아 교회를 떠날 때 평균 출석이 86명이었으니 작은 교회로서는 꽤 많이 부흥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사이 교회 예산과 헌금도 배로 늘어서, 1993년 내가 부임할 당시 목사 한 명이 두 교회를 섬겨도 목회자 사례비를 감당하지 못해 연회로부터 최저사례비(Equitable Salary)와 건강보험 일부를 지원받았었는데, 1996년부터는 탐슨교회 단독으로도 풀타임 전임 목사가 파송 받게 되었으니 놀랍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탐슨 교회 125년 역사상 두 번째 있었던 사건(?)이었다.

물론 작은 교회를 대형 교회로 부흥시킨 능력을 갖춘 목사들이나, 대형 교회로 파송을 받아 매년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등록하는 교회를 섬기는 분들에게는 그 정도는 보잘것없는 수치이리라. 그 후 내가 연합감리교뉴스를 섬기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섬겼던 북일리노이 연회의 오레곤교회에서 더 큰 부흥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인구 550명의 작은 마을의 작은 교회에서 교인들과 더불어 이뤘던 그 부흥의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지금도 그 시간을 추억하면, 교인들이 생각나고, 맘이 따뜻해지고,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교회의 부흥은 영어도 못 하는, 깨진 그릇 같은 나를 활용하신 하나님, 실제적인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신학생을 지도하신 김영일 교수님, 활발한 탐슨교회 교회학교, 세례를 받았고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던 많은 젊은 부부들이 있었고, 그 시간 그때 마침 내가 거기에 있어서 숟가락을 얹을 기회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교회학교 교사들, 특히 당시 교회학교 교감이었던 데비 맥기니스(Debbie McGinnis)의 리더십과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 나이 먹도록 철이 들 생각이 없는 나는 인정받고 싶어서인지 아직도 건방진 농담을 한다.

“나처럼 영어 못 해도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어!”

11편에 계속…

시리즈 보기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1: 타인종교회로 첫 파송을 받아 가는 분들에게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2: 축하하고 축복하는 장례 예배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3: 성경, 성만찬 그리고 기름 - 심방에 꼭 준비해야 할 것 세 가지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4: 김 목사는 스포츠광(?)이다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5: 연약함을 드러내는 목회(Ministry of Vulnerability)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6: 교인을 불안하게 하는 목사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7: 푸른 눈의 수녀님과 3년 동안 나눈 사랑 이야기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8: 검은 머리 휘날리며

덜렁이 목사 김응선의 천방지축 목회 9: 전임 그리고 후임 목사님과의 관계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11: 결혼식 주례도 할 줄 모르던 목사?

덜렁이 목사의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12: 물만 말고 술도 좀 쓰라

김응선 목사는 연합감리교뉴스의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입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더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   

개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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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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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주례 판단은 목사의 고유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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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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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디아스포라의 고백과 치유 이야기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

유석종 목사의 가족사를 담은 책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영문판 REBUILDING THE FALLEN FENCE)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 디아스포라 가족의 아픔과 치유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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