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김응선 목사가 타인종목회에 첫발을 디딘 목회자들에게 보내는 갈팡질팡 천방지축 타인종목회 시리즈의 아홉 번째로, “전임과 후임 목사와의 관계”에 관한 글이다.)

항상 고백하지만, 나는 목사로서 결함이 많고, 인간적으로도 참 부족한 사람이다. 거칠고, 목소리 크고,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고, 차분하지 못하고, 성질이 급하고, 쉽게 흥분하고, 늘 서두르고, 덜렁대고, 서툴고,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다.
그뿐일까. 거기에 감정적이어서 툭하면 질질 짠다. 나이를 먹어서 호르몬의 부조화로 인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도 그랬다. 그 때문에 아슬아슬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다행히 교인들 앞에서 그런 실수를 한 기억은 없다.
시카고 시절 한국 영화를 상영한다고 선배 목사님들과 함께 <국제시장>을 본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다가 내가 심하게 우는 바람에 선배 목사님들이 난처해하셨고, 한국에서도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다가 엉엉 울어서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가 민망해하기도 했으며, 요즘은 인기가 높은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도 마음이 아파 운다.
이렇게 눈물이 많은 걸 보면, 내가 감성이 풍부해 교인들에게 공감을 잘할 것 같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애틋한 정을 표현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잔정도 엔간히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가 어떻게 교인들 앞에서 목회를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럴듯하게 하나님이 부르셨으니 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못 했을 거라고 이유를 대로 싶지만, 그렇게 할 만큼 뻔뻔하지도 거룩하지도 못하다.
그런 내가 새로 파송 받은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즈음이면 몸이 시름시름 아프다 결국 앓아눕는다. 새로운 교회에 적응하느라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만이 아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잔정 없는 내가 떠나온 교회의 식구들을 잊지 못해서 그런다. 그래서 행여 교인들이 장례식이나 결혼식 집례, 심지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면, 철없는 나는 은근히 좋아한다.
하루는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알고 지냈던 분이 전화해서 자기 어머님의 장례식 집례를 부탁했다. 그분은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반주 봉사를 해주신 고마운 분인 데다 그분의 어머님은 오래전에 은퇴한 교사로 내가 부임했을 때는 이미 나이가 적지 않았음에도 열심히 교회를 섬기던 분이셨는데, 내가 교회를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양로원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7년이 흐른 후 임종하셨는데, 따님은 현재 그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이 어머님과 자기 가족을 잘 알지 못한다며 내게 부탁한 것이다.
여기서 사족을 달자면, 나처럼 말이 서툴고, 능력이 없는 목사가 그나마 교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생존하는 데는 이미 밝혔듯이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타인종 목회에서 가장 신경 쓰는 사역의 하나는 심방이다. 심방은 교인들과의 신뢰 관계를 형성하며, 특히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집에만 머물거나 양로원에 있는 분들의 세상을 향한 창문이 되어 주기도 한다. 또한 심방은 소통의 한 방식일 뿐 아니라, 성만찬을 통해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영적 갈급함의 일부를 해소하는 장이 되어줄 수도 있다.
나는 새 교회에 파송 받으면 부임하자마자 양로원과 건강상의 이유로 바깥나들이를 못 하고 집에만 있는 셧인(shut-in) 상태의 분들을 가장 먼저 찾아가 심방하고, 성만찬을 베풀었다. 요즘엔 목사 특히 미국인 목사 중에는 심방하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나처럼 설교도 못 하고, 언변도 없고, 거기에 영어까지 변변치 않아 소소한 소통조차 쉽지 않은 이방인 목사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엔 심방만큼 좋은 게 없을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종종 큰 은혜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매달 하루를 심방의 날로 정해 양로원과 셧인(shut-in)을 찾아가 성만찬을 베풀었는데, 이 성만찬은 단순한 시간 투자가 아니라 그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연결시켜주고, 그들이 속한 신앙 공동체와 이어주며, 더 거창하게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그 가정에까지 확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변변치 못한 늙어가는 목사인 내가 지난 30년의 목회를 되돌아보니, 목사는 설교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제로서 목사(pastor)의 다른 여러 직분도 잘 감당해야 한다. 목사가 할 사역은 설교를 비롯해 심방, 성경공부, 교리 교육, 목회 상담 행정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뿐이랴. 동네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에 참석해 교회의 얼굴 역할도 해야 한다.
목사님 중에는 자신의 장점인 설교에만 치중하고 나머지를 소홀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들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여 목회를 하겠지만, 짧은 영어 실력과 거칠고 투박한 발음을 가진 나는 지금도 교인들이 피곤하지 않게 짧게, 쉽게, 재미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아무튼 고인의 딸에게 상황을 들으니 참 딱했다. 하지만 나는 섬기고 있는 교회가 바빠서 갈 수가 없다고 말하고, 나중에 그곳에 들르면 꼭 고인의 묘지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나라고 왜 가서 장례식을 집례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나처럼 냉정한 목사도 이럴진대, 사랑과 정이 넘치는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를 떠난 후 전 교회와의 관계에서 겪어야 할 갈등과 고충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내가 첫 파송을 받았을 때,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 장례식을 직전 담임 목사님이 와서 집례했다. 그 장례식으로 인해 나는 마음이 무척 착잡했다.
첫 목회지에서 있었던 장례식을 전임 목사님이 와서 집례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 그 목사님과 만나 북일리노이 연회에서 작성한 파송에 관한 목회자 윤리를 함께 읽고 논의했다. 그 자리에서 전임 목사님은 자신도 그런 일을 겪었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말하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로 나는 나에게 새로운 목회지로 파송이 결정되면 취임하기 전 전임 목사와 미리 만나 소위 '인수인계'를 한다. 그 자리에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집에만 있는 분들(shut-in), 양로원에 있는 교인들, 입원 중인 환자 그리고 임원회(Church Council) 및 위원회 재직(Committee Members) 명단을 받고 어떤 이슈가 있는지를 듣고 그 교회에 대하여 배우는 시간을 갖는다. 특별히 사진이 포함된 교인 전화번호부(pictorial directory)가 있다면 한 부를 얻어, 부임하기 전 교인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나는 머리는 나빠도 다행히 사람 이름 외우는 것은 제법 잘했다. 또 위급한 상태에 있는 환자가 있는지, 있다면 그 가족은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해두고, 예정된 결혼식이 있다면 언제인지, 장례식과 결혼식에 오기를 원하는지를 묻고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탁했다.
"결혼식, 장례식은 교인들의 인생과 교회의 목회에 중요한 순간들인데, 담임 목사로서 최선을 다해 본분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이전 교회로 돌아가, 후임 목사의 목회에 개입하는 것처럼 철없고 못난 행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목사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최선을 다해야지 전임지를 기웃거리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 특히 후임 목사가 새로 부임해서 교인들과의 관계를 키우기도 전에 전임 목사가 장례식을 집례하겠다고, 혹은 결혼식을 주례하겠다고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많은 목사가 섬기던 교회의 교인이 부탁하면 매정하게 끊을 수가 없어서 혹은 지내온 시절의 정 때문에 차마 "NO"라고 못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한인 목사가 가면 은근슬쩍 무시하고,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 결혼식과 장례식을 주례하는 뻔뻔한 (미국인) 목사들도 없지 않다. 건강한 목회, 특히 목사와 교인 간의 신뢰 관계를 위해서, 담임 목사가 허락하고 초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임 목사는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고, 행여 교인 중 누가 요청한다고 해도 그 초대를 정중히 사양해야 한다.
하지만 자기 착각에는 치료 약도 없다는데 나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착각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만일 전 교회 교인들이 나를 부르기라도 하면 나를 특별히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줄 알고, 한술 더 떠 내가 목회를 잘해서 나를 그리워하는 줄로 착각한다.
별 목회 철학도 없는 내가 무언가를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어쩌면 건방지고 자격도 없는 일이겠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다.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집례해서는 안 된다.”
고인의 딸과의 전화를 마치자마자 그 교회 담임 목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래서 그 목사에게 “섬기는 교회가 바빠서 갈 수가 없어 나중에 그곳에 들르면 꼭 고인의 묘지를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했다.”라고 말해줬더니 무척 고마워했다. 그 미국 목사도 나름대로 고민이 컸던가 보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선을 명확하게 긋는 것은 서로를 위해서도 교회와 교인을 위해서도 건강한 일이지만, 그것은 전임과 후임 목사가 동역자로서 서로의 사역지를 존중하고 도와줘야 가능해진다. 물론 은퇴하신 목사님이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경우가 다르겠다. 출석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임 목사가 자신의 사역지를 벗어나 후임 목사의 사역지로 돌아가 그 사역을 감당하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속한 일리노이 연회의 미국 목사님들 가운데 절친한 목사님이 여럿 있지만, 나의 전임과 후임 목사님들이 그분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분들과 깊이 교류한다. 그들과 미리 만나 소통했고, 서로의 사역을 도우며 지지하는 좋은 친구이자 동역자로서 늘 기도하며 후원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가 나의 전임 목사에게 기대하는 만큼 나 역시 후임 목사에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비문이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빠꾸(후진)는 안 돼!
10편에 계속…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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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선 목사는 연합감리교뉴스의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입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더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