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기독교 윤리학자인 김영일 박사가 영화 <장미의 이름>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으로 해석한 글로,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와 윤리’ 시리즈 1-2편으로, 글의 길이 때문에 두 번에 걸쳐 싣습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히 다시 소개한다.

프랑스 감독 장 자크 아노가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1980년 이탈리아에서 된 움베르트 에코(Umbert Eco)의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이 원작이다. 1327년 11월 이탈리아의 어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벌어진 기이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다.
원제: Der Name der Rose, 1986,
감독: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출연: 숀 코너리(Sean Connery), 크리스찬 슬레이터(Christian Slater), 머레이 에이브러햄
수상: 세자르상 외국어 영화상(1987), 독일 영화상(1987),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과 남우주연상(1988)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문헌들은 8-9 세기 아랍 세계의 이슬람 학자들의 대대적인 번역과 연구를 통해 기독교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번영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문헌들이 아랍어에서 히브리어로, 그리고 라틴어로 활발하게 번역되었고, 13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서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 당시 그의 철학 사상, 예컨대, 변증론과 논리적 사유 등은 신학자들이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한편 서방 교회는 우선 이방인인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더 나아가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했다. 13세기 초 교황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를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자들은 그의 철학을 비밀리에 연구하였다. 그러다 13세기 중반부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전적으로 수용되었고,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토마스는 특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개발한 삼단논법(논증과 유추)의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거대한 작품을 완성했다.[1]
중세 시대의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신에 대한 믿음의 절대적 가치를 신중하게 다루었다. 그래서 진실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오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그 당시 수도원에서는 웃는 자들은 엄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경건한 신학자 중 많은 이들이 신앙은 근엄해야 하고 신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장미의 이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이 웃음과 슬픔을 다룬다고 설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래서 교단의 보수파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을 이단으로 간주한다. 즉 웃음을 경건하지 못하고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본 것이다. 영화에서 “웃음은 우리에게 해악인가?”라는 주제로 윌리엄과 호르헤가 두어 번 신학적인 논쟁을 벌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금지된 문서임에도 여러 수도사가 몰래 <시학 2권>을 읽었기 때문에 호르헤는 이 책에 독을 묻혀놓고 이 책을 만지는 사람을 죽게 만든 것이다.

(4) 중용이 필요한가?
장미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움과 가시, 열정과 사랑을 내포하지만, 그 속에는 아픔과 슬픔이 있기도 하다. 수도원은 인간의 이성을 억누르지만, 인간의 욕망과 본질은 자유를 갈구한다.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현실의 본질적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반면 이성이나 이상이 없는 삶이란 방향성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없거나 영양소가 부족함 같은 삶이 아닐까? 중용이 필요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교리(Doctrine of the Golden Mean)를 제안한다. 그에게 행복한 삶, 곧 선한 삶이란 행동하는 삶(life of doing)인데, 그것은 선한 원칙에 의해서 가늠되는 삶의 활동력이다. 그러면 선한 원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양극단의 균형이 유지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곧 그가 말하는 중용의 교리이다. 즉, 양쪽의 극단적인 요소들을 피하고, 양극의 중위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믿음과 실천의 중요성을 두고 겨룬 이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로마서 1:17; 5:1).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나 행위보다는 믿음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로마서 3:27-28).
한편, 야고보는 믿음보다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언급한다(야고보 2:17; 2:26).
바울과 야고보의 강조점인 ‘믿음’이냐 아니면 ‘행함’이냐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믿음과 행위는 함께 공존해야 할 요소가 아닐까?
요한 웨슬리는 ‘오직 믿음으로’를 주장한 바울과 마틴 루터를 비롯한 그 후예들, 그리고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야고보와 그 후예 간의 세기적인 논쟁을 화해시키고 종합한 공헌자이다. 그에게서 믿음은 필수적 요소이지만, 믿음의 생활화, 즉 행함은 믿음의 결과로써 두 요소의 중요성을 함께 인정하였고, 웨슬리는 그의 목양이나 신학에서 삶의 열매를 실질적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었다. 그 예로, 웨슬리는 빈곤층을 대상으로 열정적이며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목회 활동을 펼쳤다. 바로 그의 ‘거룩한 프로젝트 (Holiness Project)’이다.
(5) 종교의 기능
종교는 사회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인간 사회에 미치는 종교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긍정적 차원에서 종교가 부여하는 기능과 역할을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meaning)를 공급한다는 것이다.[2] 의미란 인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사건을 해설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가”라는 사람이 암에 걸려 죽었다고 할 때, 많은 사람이 이러한 상황과 사건을 다르게 해설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그가 운수가 나빠서라고, 다른 사람은 그가 건강관리를 잘못해서 암으로 죽었다고, 또 다른 사람은 그가 죽은 것은 환경오염의 문제 때문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등등 각각 다른 해설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의미 시스템을 공급한다. 즉 믿음의 공동체와 의미 시스템 사이에는 직접적 관계가 있다. 피터 버거(Peter Berger)와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은 종교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가리켜서 ‘세계관(world view)’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종교적 세계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하다.[3] 왜냐하면, 세계관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생의 의미를 공급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해설하고 그 현실의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고 주장한다.[4]

의미 시스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설명적 의미 시스템이고, 다른 하나는 규범적 의미 시스템이다. 설명적 의미 시스템은 세상일에 대하여 왜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지시에 대하여 설명이 요구되는 것을 말한다. 규범적 의미 시스템은 “당연성”에 관한 것으로 세상일들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처방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질서에 있어서 이치에 맞는 것을 내포한다.
둘째, 종교가 부여하는 기능과 역할은 소속감이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공급하는 소속감은 개인에게 결속력을 주어서 외롭지 않게 하며, 삶의 안정감을 느끼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소속감은 멤버들 상호 간의 연대성을 조성해 주기도 한다. 뒤르켐은 그의 ‘자살’이라는 연구에서 소속감과 결속력 그리고 의미가 없을 때, 사람들은 아노미(anomie) 현상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자살에 이르는 동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 종교는 사회 통합의 기능을 한다. 종교의 사회 통합 기능, 즉 사회적 응집력의 기능을 뚜렷하게 주장한 사람이 뒤르켐이다. 그는 건강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규범과 가치관을 종교가 마련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촉진하며, 믿음의 공동체는 도덕적인 공동체 기능까지 겸비한다고 본다. 뒤르켐은 결론짓기를 종교적인 의식과 상징을 근거로 개인들이 그 집단의 믿음의 공동체와 연결되고, 그러한 과정에서 개인들은 배우고, 성장하고, 의미를 교환하고, 결속을 다진다고 한다.[5]
넷째, 종교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제공한다. 인간은 대부분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예측과 기대가 무너지고 실망하고 상처받을 때가 많은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간에게 문제가 생기고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할 때, 그들은 무언가 초월적인 힘을 찾고 의지하게 된다. 종교는 인간의 죄의식을 삭감해 주고, 실망과 슬픔을 당할 때 위로해 주고, 방황하고 불안해할 때 안정감을 준다.
다섯째, 종교는 제한성에 희망을 준다. 인간은 무력한 존재임을 실감한다. 죽음은 인간의 제한성을 확인해 주는 좋은 예이다. 감기 하나에도 무력해지고, 암이나 심장마비나 뇌졸중 등에도 속수무책일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상황은 초월적인 존재를 갈구하게 되고, 인간은 의존적 감정을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한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들에게 초월자의 힘과 내세의 희망을 확인시켜 준다.
여섯째, 종교는 때로 사회 변화의 동기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런 운동을 주도하기도 한다. 마르틴 루터와 존 칼빈의 종교개혁이 그렇고, 존 웨슬리의 사회개혁과 부흥 운동이 그렇다. 또한 종교는 사람들의 의식 변화와 행위 변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유도하기도 한다. 때로 종교는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에 도전하고, 부조리와 모순, 부정과 부패 등에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하기도 한다. 기독교 구약에서 이와 같은 예언자적인 기능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곱째, 종교는 윤리적 규범과 가치관을 제시하거나 기존의 것들을 시정하기도 하여, 옳고 그름이나 선악이 무엇인지 안내한다. 바꿔 말하면, 종교는 사회 질서와 사회 양심을 고취시킨다.
중세 시대의 천주교는 어떤 모습이었나? 교회는 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요소 또한 많았다. 사회, 즉 평민들에 대하여 극도의 권위주의로 그들을 돌보기보다는 그들을 이용하여 치부를 일삼았다. 높은 세금을 징수했고, 그들의 울음소리를 외면했다. 사회를 외면하는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니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삼단논법/연역추리를 개발한 사람이다. 연역추리란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시작하여 개별적 혹은 구체적인 사실로 도달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소금은 짜다. 국에 소금을 많이 넣으면 국이 짜다. 이 국에 소금이 많이 들어가서 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역추리가 사고의 정확성과 보편성을 보장해 준다고 보고, 학문은 연역추리에 의해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귀납추리는 개별 경험 사실을 바탕으로 일반원리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이분은 늙어서 죽었다. 많은 사람들도 늙어서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
[2] Meredith B. McGuire, Religion: The Social Context, 2nd edition (Belmont, California, 1987), pp. 23-31.
[3] Peter Berger and Thomas Luckmann, The Social Construction (Garden City, New Jersey: Doubleday, 1966).
[4] Clifford Geertz, “Religion as a Cultural System,” in Anthropological Approaches to the Study of Religion, M. Banton, edited (London: Tavistock, 1966), pp. 1-46.
[5] Durkheim, Elementary Forms of the Religious Life, p.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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