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정신으로 재해석하는 기독교 선교 2: 에큐메니칼 희년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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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 선교부 주재선교사(Missionary in Residence)이자 필리핀 선교사였던 최재형목사의 “희년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는 기독교 선교시리즈 3 번째 글이다.) 

사진 제공, 최재형 목사.사진 제공, 최재형 목사.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전통적인 관점으로 선교의 개념을 볼 때, 저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의 의미가 종종 모호해졌던 경험이 있습니다.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구령의 열정으로 사역하면서, 그 나라, 그 지역의 상황, 특히 빈곤의 상황에서 “선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했습니다.

스페인으로부터 가톨릭 선교사들이 필리핀에 도착한 지 벌써 500년이 지났고, 개신교의 필리핀 선교가 시작된 지도 한 세기가 넘어, 이제는 필리핀에 120년이 되어가는 개신교 신학교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온 단기 선교팀들이 대학 캠퍼스 등을 돌며 노방 전도를 통해,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하면, 전도자들과 현지인들이 동시에 멋쩍은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선교가 “교회 건물을 세우는 것”이라면, 이미 대부분의 도시와 시골에 성당과 교회가 있습니다. 그중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필리핀 마을(barangay)에서 로마 바티칸(Vatican)까지 연결된 가톨릭교회의 조직이며, 이는 현지인들의 일상과 의식을 깊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더불어, 필리핀에서 오순절 교회가 급성장하는 주목할 만한 상황에서, “기독교화된 필리핀(Christianized Philippines)”과 “기독교화하려는 선교(Christianizing mission)”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합니다.

그런 이유로, 기독교 국가인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섬기면서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에큐메니칼 희년 선교(Ecumenical jubilee mission)입니다.

 

선교적 지상명령과 일치(Unity)

선교를 위해 가장 잘 알려진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28:18-20의 대위임령(Great Commission) 혹은 주님의 선교지상명령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구절은 그동안 제도적 교회의 공격적인 확장을 암시하는 데 사용되거나 제국주의적인 선교를 묵인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오용되어 왔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이 말씀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서 새로운 존재들이 된 것처럼 그렇게 변화된 윤리적 존재들로 이 세상을 채워 나가라고 하신 것.”으로 주석했습니다.1

우리가 바르트의 해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지상명령을 양적인 확장에만 초점을 둘 게 아니라, 복음 안에서 한 개인의 전인적 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신 주님의 마음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선교지상명령에만 매몰되어 또 다른 중요한 선교지상명령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예수께서 요한복음 17:11에서 “우리 [성부와 성자]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일치 명령입니다.

교회의 선교와 교회의 일치는 동전의 양면 같아서, 일치의 선교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선교지상명령이 복음을 전파하러 “나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선교일치명령은 복음 안에 “거하며,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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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선교에 익숙한 눈으로 보면, 내적 일치를 강조하는 것은 다소 수동적이고 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선교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교회의 하나 됨은 세상을 향한 매우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사회적 증언(Social witness)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실한 사랑은 세상의 무관심이나 증오와 대조되고, 교회가 추구하는 평화는 세상의 폭력과 비교되며, 그리스도인 사이의 우애와 평등은 사회계급과 불평등을 고발하고, 교회의 일치는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세상을 위한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일치는 이처럼 기독교 선교의 심오하고도 실천적인 지침이 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선교를 위한 든든한 기초가 되기 때문에, 어느 것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마태복음의 지상명령에 따라, 원심적 선교(밖으로 나가는 선교)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와서 보도록 하는(요한복음 1:39)” 구심적 선교는 소홀히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선교에서 “선포와 일치” 그리고 “나감과 돌봄”의 균형에 훼손을 입힌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지 가정 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족들이 가정 밖에서 수용과 인정을 바란다거나, 부부간의 문제가 생겼을 때, 배우자들이 엉뚱한 곳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문제는 안에 있는데, 밖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것은 역설이며, 밖으로 돌면 돌수록, 상황은 더 악화될 뿐 아니라, 이웃과 타인들의 비난과 동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교회로 돌아와 보면, 실제로 많은 교회가 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정상인 것처럼, 선교적 아웃리치 프로그램을 활발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개별 교회를 넘어 교단과 공교회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교회의 일치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몸부림을 기억하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됨에 무관심했거나 그것을 너무 당연시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의 분쟁과 불일치가 견딜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했던 뼈아픈 사실과 그럴 때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며 희생되었던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선교는 진정한 회개(metanoia)를 통해, 교회 됨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kenosis)을 본받아, 하나 됨을 위해 애쓰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교회가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사도적 전승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질이자 근본정신 아니겠습니까?   

 

일치에서 희년으로

이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선교를 볼 때, 필리핀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전통과 교단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치의 정신 아래 마음과 힘을 다하고, 선교사들은 경계를 넘어(crossing boundaries) 일치를 향한 자양분이 되며, 교단들은 서로의 약점을 드러내고 지적하기보다 각자의 강점을 통해 서로의 약점을 상호 보완해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함께 성숙해 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일치를 향한 여정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사가 되며, 교회는 사랑과 정의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장이 됩니다.

교회의 일치는 이렇게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힘 있는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도구를 통해 교회가 궁극적 목적지와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교회들은 어디에서 선교적 일치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까요?

우리는 더 이상 “교리와 신념”의 교류 안에서만 일치의 가능성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에큐메니컬 정신의 바탕 위에서 각 교회의 전통과 신앙을 존중하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시급하고 보편적인 문제(most urgent and universal problem)”를 어떻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할 것 인가에서부터 일치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종국에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성자 예수께서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위임받은 위대한 선교지상명령의 원형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the Year of Lord’s favor, jubilee)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하나님의 선교가 삼위의 일체에서 흘러나와 세상의 가장 낮은 고난의 자리로 흘러내리며 생명을 소생시키는 것처럼, 교회의 일치 안에서 나오는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세상의 가장 시급하고 보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로 에큐메니컬 희년 선교입니다.

3편에 계속…

 

관련 시리즈 보기

희년 정신으로 재해석하는 기독교 선교 1

희년으로 기독교 선교 상상하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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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arl Barth, “An Exegetical Study of Matthew 28:16–20,” In The Theology of the Christian Mission. Gerald Anderson, ed. (New York: McGraw Hill, 1961), 5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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