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 선교부 주재선교사(Missionary in Residence)이자 필리핀 선교사였던 최재형 목사의 “희년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는 기독교 선교” 시리즈 3편 중 첫 번째 글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선교를 “도움(helping)”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타자를 돕는 것”이 선교의 중요한 부분인 것은 맞지만, 선교의 전부는 아닙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려는 선교에 냉담하거나 적대감을 드러내는 현지인들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교에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의 효율성이 증가함에 따라, 세상에는 재화가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이 빈곤을 매일 짊어져야 할 무겁고 버거운 짐처럼 느끼는 이 현실의 문제를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 속 모세와 선지자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동일하게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 모두가 현실이 가진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어 근본적(Radical)으로 대응했다는 점입니다.
열두 사도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고, 더 거슬러 올라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거쳐 모세 율법의 핵심으로 다가가면, 우리는 희년의 법 앞에 서게 됩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희년, 특히 희년이 가르치는 토지 소유권의 원리와 그것이 기독교 선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간략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희년 정신
희년의 법은 모세오경의 중심인 안식법의 절정이며, 50년마다 주기적으로 토지 소유권(기업)을 회복함으로, 정의와 공평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든 법입니다. 레위기 25장은 토지, 노동, 주택 및 이자에 관한 규례 등 희년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토지법은 다른 법의 기초가 됩니다. 특히,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23절 말씀은 희년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고대의 규정을 지배하는 법 정신은 “공평과 정의”이며, 이 정신을 바탕으로 희년법이 지향하고 구현하고자 했던 사회는 모든 사람의 (1) 의식주가 보호되고, (2) 속박받는 일이 없으며, (3) 사회의 안전망 안에서 사회·경제적, 윤리적, 영적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즉, 희년의 법은 하나님께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빈곤과 억압을 근절하고,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도록 제공해주신 은색 탄환(Silver Bullet)과 같습니다.
성경은 이 희년의 백성을 거룩한 구원의 백성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공동체가 공평과 정의를 통해, 빈곤과 불의로 가득 찬 세상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도록 부름을 받은 선교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소유권 원리
성서의 희년법이 가르치는 소유권의 원리는 사유(private ownership)와 공유(communal ownership)가 유기적으로 조합된 형식입니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것은 그 개인의 소유로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신적 노동을 통해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소유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전도서 5장 9절(개역개정)은 이 하나님의 소유에 대해,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라고 말하며, 희년의 법이 토지의 소유권, 사용권, 이전권이 모두 공평과 정의의 원칙 아래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로부터 약 2천년 후, 토지문제로 빈부격차가 심했던 갑바도기아(오늘의 터키) 출신이자 카이사랴의 감독이었던 바질은 이 희년의 소유권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소유권에는 ‘나의 것(ta idia)’과 ‘우리의 것(ta koina)’이 있습니다. ‘나의 것’이란 내가 나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것임으로 사유재산이 되고, ‘우리의 것’이란 인간이 창조되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토지와 공기 같은 것들은 인간의 노동이나 노력으로 생겨난 것들이 아닙니다.”1
로마제국 곳곳에서 기승을 부리던 토지독점이 어떻게 평민들을 땅에서 몰아내고, 빈곤의 늪에 빠지게 하며, 노예로 전락시키는지를 목도한 바질 감독은 땅의 첫 정착자이든 땅을 정복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하도록 한 토지를 사유화하고 독점하는 것은 “도둑질”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2
헨리 조지(Henry George)와 희년
바질 감독으로부터 천 오백 년이 지난 19세기 후반, 샌프란시스코 출신의 한 가난한 청년이 뉴욕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청년은 맨해튼의 하늘을 찌르며 올라가는 많은 고층 건물과 그 건물들 아래에서 빈곤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경제가 성장함과 동시에 빈곤이 깊어져 가고, 부의 생산이 증가함과 동시에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이 당황스러운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고자 결심하게 됩니다.3
이 청년은 바로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진보 속의 빈곤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 책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의 저자 헨리 조지(Henry George)입니다.
그는 낮에는 노동자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공공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며 스스로 연구한 결과, 그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경제 성장 속의 빈곤 원인이 소수가 토지를 사유화하고 독점하는 것임을 알게 된 그는 그 근본적인 사회문제의 해결 방안이 성경이 가르치는 희년의 법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고대 농경사회의 법인 희년의 법을 과연 현대 사회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헨리 조지는 구약의 말씀에 따라 땅을 50년마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마다 증가하는 토지의 가치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여, 그 수입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돌려주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성경의 십일조에서 착안한 이 방법은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이 토지의 소산을 토지를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과 토지를 잃을 가능성이 높았던 고아와 과부들에게 일정량 나누던 것과 같습니다.
헨리 조지가 주장한 이 방법을 사람들은 “단일세”라고 불렀는데, 이는 개인의 노동으로 생긴 소득에 대한 세금은 없애고, 오직 토지 가치의 증가분만 세금으로 거두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관점에서 헨리 조지의 제안을 평가해 본다면, 그의 “단일세” 운동은 부의 양극화와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경제적 구조개혁을 주창함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헨리 조지의 사회개혁 사상이 바로 성경의 희년법의 원리임과 동시에 초대교회가 실천한 코이노니아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헨리 조지의 사회사상에 큰 감동을 받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성경의 희년 정신을 자신의 소설에 포함시켜 러시아 사람들, 특히 소작농들을 계몽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톨스토이의 사상에 매료된 중국의 초대 대통령 손문은 그의 삼민주의의 세 번째인 경제 부분에 헨리 조지의 사상을 포함시켜 근대 중국의 경제적 기초로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모택동이 이끄는 홍군(Red Army)의 승리로 손문의 후계자인 장개석 장군은 당시 포모사 섬(대만)으로 후퇴하게 되고, 결국 그곳에서 손문의 경제정책을 실천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불교 국가인 대만에는 경제적 기초에 성경의 희년의 원리가 간접적으로 적용되어 있습니다.
희년과 선교
우리나라 강원도 황지에는 유명한 예수원이 있습니다.
예수원은 미국 성공회의 파송을 받은 고 대천덕 신부님(Reuben Archer Torrey III)이 설립한 공동체입니다.
약 50년간 한국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사역을 펼치신 대 신부님은 성경론의 저자이신 토레이 목사님으로부터 헨리 조지의 책인 “진보와 빈곤”을 소개받고, “빈곤에서 벗어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한국어 번역본을 출판하셨습니다.
전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와 희년을 외치셨던 대 신부님을 통해, 한국의 많은 젊은이가 희년 한국, 통일 한국, 선교 한국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고, 예수와 희년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선교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과 가난의 원인을 해결하는 것 모두를 포함합니다. 역사의 거대한 전환기를 맞은 현재야말로, 교회가 희년으로 기독교 선교를 다시 상상해야 할 때입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그늘에는 여전히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받고, 절규하며, 하나님의 정의에 목말라하기 때문입니다.
임종을 맞으며, 대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희년을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웨슬리가 행한 선교 가운데 가장 대담한 사역이 농민들을 땅에서 몰아내고, 산업혁명 당시 그들을 도시를 떠도는 유랑무산계습자(Lumpenproletariat)로 전락시킨 영국의 토지 종획운동(The English Enclosure)을 비판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4
또한 웨슬리의 그 용감한 사회적 행동의 중심에 성령님의 능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그 성령님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임한 영이시며, 주님의 은혜의 해인 “희년”을 전파하도록 하신 선교의 영이심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2편에 계속…
관련 시리즈 보기
희년 정신으로 재해석하는 기독교 선교 2: 에큐메니칼 희년 선교
1. Charles Avila, Ownership: Early Christian Teaching (Eugene, OR: Wipf & Stock, 2004), 135.
2. Avila, Ownership, 135.
3. Henry George, Progress and Poverty (New York: Robert Schalkenbach Foundation, 1997), 12.
4. Francis McConnell, John Wesley (New York: Abingdon Press, 1939),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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