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종교개혁의 현장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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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텐베르그성 교회(Schlosskirche) 종탑에서 내려다본 비텐베르그, 사진 제공, 이형규 목사.비텐베르그성 교회(Schlosskirche) 종탑에서 내려다본 비텐베르그, 사진 제공, 이형규 목사. 

나는 거의 30년 만에 독일 중부에 위치한 튀링겐주의 작은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를 다시 방문했다. 1995년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 나는 <월간음악>이라는 클래식 음악 잡지의 뮌헨 통신원으로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이곳을 찾아 <Bach House>를 취재했었다.

그 사이 세월이 흘러,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목사가 되어, 다시 찾은 아이제나흐는 27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풍기는 ‘묵직함’은 은근히 매력적이다. 온갖 곡물로 만든 검고 딱딱한 독일 빵의 맛처럼, 독일은 얕은 변화보다 진중한 깊이를 추구하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트부르크(Wartburg) 성은 루터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출교 명령을 받은 후, 10 개월 동안 비밀리에 머물렀던 곳이다. 1517년 10월 31일 시작되었던 로마 교황청과의 투쟁은 “출교 명령”이라는 결말로 이어졌고, 1521년 4월 18일 황제 찰스 5세 앞에서 루터를 “악명 높은 이단자”로 지명하는 출교식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후견인들은 이를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그때까지 루터를 조용히 후원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Elector) 프리히드리히(Friedrich der Weise)는 신중한 계획을 세워 가짜 납치극을 꾸몄고, 몇 번에 걸쳐 장소를 옮긴 끝에, 1521년 5월 4일 한밤중 루터를 바트부르크 성문에 도착하게 만들었다.  

이 바트부르크 성은 루터의 피난처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당시 새로이 벽을 복구해 외벽이 튼튼한데다 문지기가 입구를 지켜 철통같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루터를 두고 당대 유명한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루터를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 피난처에서 이단자 루터는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보름스에서 이단자로 명명되어 파문당하던 순간, 그의 가방 안에 들어있던 구약과 신약 성경 그리고 친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결심이었다. 첫 작업인 4 복음서는 1522년 1월 비텐베르그로 보내졌고, 멜란히톤과 함께 마무리한 “September Testament”는 그해 가을에, “December Testament”는 같은 해 겨울에 완성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번역은 당시 글을 읽을 줄 아는 10퍼센트의 독일 국민이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현대 고급 독일어 작문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다.

바르트부르그성 안에 있는 루터의 방을 향해 걸으면서 나는 그의 복잡했을 심정을 상상해 보았다.

억울함과 비통함,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내적 확신과 많은 동지의 성원이 평민의 옷을 입은 채 이름까지 융커 외르크(Junker Jörg)라고 바꾸고, 수염과 머리를 길러 변장을 하고 숨어 지내야 했던 루터의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게 해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성서 번역을 이뤄낸 루터의 열정과 야심이 뒤섞인 오묘한 심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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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루터의 내면과는 달리 그의 토굴방은 실망스럽게도 단촐하고 정갈했다. 오래전에 보았던 투박한 황토 흙 바닥 대신 말끔히 정돈된 돌바닥이 그 이유였다. 역사는 그 장소 그대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야 더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옛 대가의 자취를 느끼고 싶은 방문객에게, 현대화된 성지는 왠지 달갑지 않은 문명의 이기로 인식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나도 꼰대의 세대가 되어 가고 있나 보다.

아이제나흐를 떠나 루터가 수도원 생활을 시작한 어거스틴 수도원이 있는 에르푸트르(Erfurt)를 향했다. 에르푸트르는 루터의 신학적 질문과 고민이 시작된 곳이자 종교개혁의 사상적 씨앗이 태동한 공간이다.

자, 이제 우리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1505년 7월 2일, 벼락이 바로 옆에 떨어지는 공포를 경험한 이후 루터는 준비된 법과 대학의 수업 교재를 버려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주가 지난 1505년 7월 17일, 수도사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선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한 영생을 체험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길은 루터를 오히려 길고 어두운 신학적 혼돈으로 빠져들게 했다.  

중세의 신학적 주제인 죄, 죽음, 심판, 죽음, 사탄, 하나님의 분노가 그를 짓눌렀으며, 어거스틴의 예정론과 하나님의 심판 역시 그에게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금욕과 복종의 일상을 살며 끊임없는 참회 속에서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던 루터는 마침내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증오하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마저 싫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질문이 끊이지 않던 루터는 계속해서 하나님은 진실로 인간을 증오하시는가? 그 하나님의 진노의 끝은 죽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고, 이러한 루터의 과도한 고민과 계속되는 절망을 지켜보던 한 고해 신부는 그를 질책했다. “바보 같으니라고... 하나님은 너한테 화를 내시지 않아. 네가 하나님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라고!”1

어느 날, 루터가 존경하던 스승인 요한 폰 슈타우피츠(Johan von Staupitz)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자네, 나 좀 보게. 만약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용서하길 기대한다면, 시시한 잘못 말고, 부모살해나 신성모독 또는 간음 같은 짓을 저지르고 와서 회개하게.”2

하지만 루터의 고집스러운 참회와 풀리지 않는 신학적 회의는 거의 10년이나 지속되었다.

어쩌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루터는 시편에서 자신의 오랜 회의의 실마리를 찾았다.

1512년 10월 박사학위를 딴 이후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시편과 바울 서신을 강의하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다가왔다. 바로 시편 22편의 첫 구절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였다.

아! 이 구절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가 아닌가? 죄 없는 거룩한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실 때 부르짖던 이 절규를 읽고 루터는 질문했다. 아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아버지도 같이 고통을 받으셨을까? 대답은 Yes! 드디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껴왔던 자신의 오랜 절망이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루터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기꺼이 인간의 고통과 함께하시는 분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진정한 의로움(genuine righteousness)이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다시 루터는 사도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공의(Justitia Dei)에 대해 묵상했다. 로마서 1:17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의 라틴어 문장을 가지고 오랜 날을 씨름하던 그에게 드디어 위대한 타결이 이루어졌다. 비텐베르그 수도원 도서관 종탑에서 갑자기 구원의 신비를 풀어주는 열쇠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란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에 의해 살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또한 복음은 자비로운 하나님이 믿음에 따라(by faith), 수동적인 의로움으로(with a passive righteousness),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심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되리라’로 기록된 것이라는 것을...”3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1516년과 1517년 루터는 조용히 이 <종탑경험>을 내면화하며, 그 통찰력을 강의와 영적생활에 적용하고, 새로운 성서 해석과 구원론 및 구원신학으로 발전시켰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 사진 제공, 이형규 목사.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 사진 제공, 이형규 목사.   

다시 현실로 돌아와, 라이프찌히를 거쳐 이 에르푸트르 어거스틴 수도원에 도착한 후 나는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 방문객이 거의 없던 늦은 오후, 예배당에 앉았다. 이곳에서 루터가 예배를 드렸었고, 수도사로 설교도 했었지! 무려 10여 년 동안의 씨름 끝에 얻은 새로운 깨달음 덕분에 기독교의 새 역사가 태동한 곳이라 생각하니 감동이 몰려오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보름스 칙령을 받아들이기 위해 출발하기 직전, 루터는 이 교회에서 과연 무슨 설교를 했을까?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선포했을까? 아니면, 동지들이여 걱정 말라고 선포했을까?

역사의 시계가 째깍째깍 폭발의 순간으로 다가가는 사이 나는 마지막 목적지인 비텐베르그로 향했다. 아, 비텐베르그! 그렇게 오랫동안 들어왔지만, 번번이 방문 기회를 놓쳤던 종교개혁의 성지를 드디어 방문하게 되었다.

수십 개의 계단을 따라 올라간 비텐베르그성 교회(Wittenberg Castle Church)의 종탑에서 내려다본 비텐베르그는 적갈색 지붕이 도시 전체를 물들인 전형적인 중세풍의 도시였다. 어떻게 이런 색상을 만들어냈을까? 혹시 루터의 내면에 쌓여간 거룩한 열정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루터가 새로운 신학적 통찰 덕분에 내적으로 충만했던 1517년, 바깥세상에서는 다른 종류의 열정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52세 도미니칸 수도사 요한 텟젤(Johann Tetzel)이 교황과 마인쯔 대주교의 위탁을 받아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변질된 중세 신학과 타락한 교회의 금권정치가 결탁하여, 죄와 구원이 동전 몇 푼에 팔려나가는 현실에 루터는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야만 했다. 그리고 면죄부를 사러 사람들이 몰려올 10월 31일은 그것을 밝히기에 최적의 날이었다.

루터의 추스를 수 없는 분노를 생각하며 여행자는 종탑에서 내려와 <95개조 반박문>이 걸려 있었다는 역사적 현장 앞에 섰다.

교회의 전통은 루터가 반박문을 철문에 못 박았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는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의 공식적인 절차에 맞춰, 잘못을 지적하는 겸손한 편지를 브란덴부르그 대주교에게 보낸 후, 공식적인 논쟁을 제안하는 서한을 공개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낮은 직급의 교수에 불과할 뿐 아니라, 여전히 깊은 죄성을 지닌 사람임을 깊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

역사적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그 문 앞에 그냥 오래 서 있었다. 새 지평과 세상을 열어준 루터의 가슴을 느끼고 싶었다. 웨슬리가 처음부터 새로운 교단을 창설하려는 의도를 하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루터 역시 처음부터 극렬하게 막강한 교회의 권력과 투쟁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불이해와 불의를 바로잡고 싶었을 뿐!

따뜻한 오후, 비텐베르그를 천천히 걸으면서, 여행자는 개혁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오래된 믿음과 확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해 보는 것, 바로 그것이 웨슬리와 루터가 열고자 했던 세상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현재에 만족하거나 자족 또는 안주하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는 점점 쇠퇴의 길로 빠지는 반면, 회의론자가 많은 공동체는 새로운 대안으로 시대를 헤쳐 나갈 가능성이 커지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루터가 500년 전 씨름했던 신학적 주제들을 현대 교회가 다시 재 정립 (Re- formation)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와 악, 심판과 구원, 은총의 문제가 새롭게 이해될 때,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그래야 우리가 하는 설교와 교회론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며, 그런 작은 출발이 우리 시대에 새로운 불길을 만들 수 있다.

주 1) Carlos M. N. Eire: Reformations: The Early Modern World, 1450-1650, p.141

2) Carlos M. N. Eire: Reformations: The Early Modern World, 1450-1650, p.142

3) Carlos M. N. Eire: Reformations: The Early Modern World, 1450-1650, p.145

4) Richard Marius, Martin Luther: The Christian between God and Death, 1999. p.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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