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미주 독립운동을 이끈 이대위 목사 1

(편집자 주: 이글은 유석종 목사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미주에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이끈 이대위 목사를 기억하고 그분의 활동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정리한 2부 중 1부다.)

사진, 이대위 목사 1878—1928.이대위 목사 (1878—1928)

미주 한인교회는 단순한 종교기관을 넘어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한인사회 발전을 도모하며, 민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특히 일제 강점기, 미주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 지도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목회자의 신분으로 초기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며 광복 운동의 최전선에서 헌신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상항한인감리교회 이대위 목사다. 성직자이자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독립운동가, 언론인, 발명가로서 초기 미주 한인사회의 굳건한 기둥 역할을 해온 그런 그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과 함께 미주 독립운동사의 주요 인물로 학계와 정부 차원에서 재조명되고 있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대위의 상항(샌프란시스코) 도착과 유학

이대위(李大爲, David Lee)는 1878년 평안도 강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학을 수학했고, 이후 평양의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에서 근대 학문과 기독교 신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유학을 위해 1903년 4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는데, 그가 도착한 1900년대 초 한말 정세는 말 그대도 풍전등화였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침투하자 조선 정부는 러시아·청나라·일본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점차 국력을 잃어, 백성들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1903년 한인들의 미주 이민이 시작되었다. 초기 이민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하와이 농장에 계약직 노동자로 파견된 집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직접 미주 본토로 입국한 소수의 학생·상인·정치 망명객들이었다. 이대위는 바로 그 소수의 유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대위는 2년 반 동안 각종 잡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학교 진학을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27세의 나이에 포틀랜드 아카데미(Portland Academy)에 입학해 30세에 중등 과정을 마친 그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 Berkeley)에 진학해 역사학을 전공하고 한인 최초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대위가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서구 문명의 발자취를 탐구함으로써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대학 시절 그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름방학 때면 철도역에서 노동과 사무일을 병행했는데, 이 사정이 한인사회에 알려지자, 교포 25명이 매년 1인당 15달러씩 장학금을 모아 그의 학업을 후원하게 되었다.

이후 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전도사로 사역하던 그는 샌 안셀모(San Anselmo)에 소재한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의 학구열과 뛰어난 어학 실력은 훗날 미주 교계와 한인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1926년, 샌프란시스코 한국국어학교 학생과 이대위 목사. 사진 출처,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1926년, 샌프란시스코 한국어학교 학생과 이대위 목사. 사진 출처,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이대위 목사의 민족목회

1911년 2월, 이대위는 양주삼, 윤병구에 이어 상항한인감리교회 제3대 담임전도사로 취임하며 본격적인 이민 목회에 나섰다. 이후 서거할 때까지 17년간 성직자의 신분을 지키며 그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혼신을 다했다.

그의 목회는 단순히 개인의 영적 구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민족의 구원이라는 더 큰 목표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은 한 샘에서 나온다.”라는 신념 아래,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듯 애국 열성의 피로 세례를 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금수강산의 복지를 되찾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개인의 허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을 수 있지만, 민족의 허물과 수치는 우리 자신의 피 흘림 없이는 씻을 수 없다.”라며 민족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거룩한 피를 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대위 목사는 1920년 8월 15일, 교회 안에 국어학교를 설립해 미주에서 성장하는 2세들에게 한글과 조선 노래, 역사, 지리 등을 가르치며 민족적 뿌리를 지키도록 힘썼다. 특히 주일 저녁마다 열리던 정규 토론회에서는 청년들에게 민족의식과 사회의식 및 시대적 사명을 심어주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립운동 중 체포되어 모국에서 옥고를 치르는 애국지사들을 위한 특별 기도회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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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으로 시무하는 한편, 이대위 목사는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인정한 항구 선교사(port missionary)로, 또 이민국 공인 통역사로 활동하며 여권이나 빙표(비자)없이 샌프란시스코에 입국하는 한인 망명객과 학생들의 입국을 도왔다. 그는 또 합동결혼식을 집례하며, 한인 공동체의 결속과 정착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상항한인감리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샌프란시스코를 넘어, 한인 이민자들이 웅거하는 여러 지역에 기도처와 교회를 세우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09년에는 멕시코 유카탄에 전도사를 파송해 선교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대위 목사 시절에는 한인 선교 지역을 더 확대하여, 1914년 11월에는 일본인교회들과 함께 남감리교회 태평양연회 동양인 선교지방에 속해 있던 한인 교회들을 한인교회지방회로 분리하기도 했다.

이대위 목사는 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으로 취임한 직후, 초대 담임자인 양주삼 목사(기독교대한감리회 초대 총리사, 대한민국 초대 적십자 총재)가 창간했으나, 1910년 11월호를 끝으로 정간된 월간잡지 <대도(大道, The Korean Evangel)>를 복간하고 주필로 활동했다.

<대도>는 미주에서 발간된 최초의 한글 월간잡지로, 기독교 복음과 신학 사상을 전하며 도덕심을 함양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국제 소식과 근대 학문 소개 및 민족의식을 고취해 개인과 교회, 그리고 민족이 함께 발전하는 큰길(大道)을 제시하는 그릇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과 국권피탈을 반대하고 조약 무효를 천명한 항일 논조로 인해, 일제가 한국 내 배포를 차단하고 경제적 압박을 가하면서 한때 1,200부까지 발행되던 잡지는 재정난으로 결국 발행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914년, 이대위 목사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의 주선으로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관이 마련되었다. 이목사는 곧 상항한인감리교회를 총회관으로 이전하고 비용을 분담하여, 교회가 자체 성전을 건축한 1930년까지 16년 동안 모든 종교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이 한 건물에서 함께 이루어지게 했다. 이렇게 이대위 목사 시대의 교회는 한인사회와 뜻을 모아, 이민 사회 개척과 조국광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함께 풀어나가고자 하였다.

(2부에 계속)

참고 문헌

성백걸,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역사, 한들출판사, 2003.

유석종, “이대위의 민족목회와 독립운동”, 미주한인 독립운동지도자 재조명,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유석종, 애국지사 이대위: 생애와 글 모음, 북산책, 2010.

최기영, 잊혀진 미주 한인사회 대들보 이대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유석종, “이대위: 초기 미주 한인사회를 이끈 지도자”, 길 위에 길을 내다: 미주 한인 이민 역사를 만든 16인, 대한기독교서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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