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포인트:
- 30대 초반에 심장마비를 겪은 앤디 올리버 목사는 자신의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번아웃된 목회자에서 열정적인 활동가로 방향을 튼 그의 여정에는 홍보 업무와 바텐더로 일한 독특한 경험도 포함되어 있다.
- 현재 다시 교회 목회로 복귀한 올리버 목사는 동료와 함께 주 내 불법체류 의심 이민자들을 수용하는 구금 시설 앞에서 매주 시위를 이끌고 있다.
30대 초반 심장마비를 겪은 앤디 올리버(Andy Oliver) 목사는 충격으로 목회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바텐더로 일하며 “삶의 의미를 재정립”했다.
“의사가 ‘혈관은 깨끗합니다. 혹시 스트레스가 많으신가요?’라고 묻던 순간, 저는 병가를 내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현재 세인트피터즈버그 올렌데일(Allendale) 연합감리교회 담임으로 돌아온 올리버 목사는 연합감리교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처음 두 교회 파송 때에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감리교 시스템 안에서 교단 지도부의 눈에 벗어날 만한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한 동료의 편지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두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식을 교단 규정 때문에 주례하지 못한 일은 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는 목회를 그만두었다.
“저를 정말로 움직인 것은 신학교 동료에게서 받은 한 통의 편지였습니다.”라고 올리버 목사는 말했다. “그는 신학교 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공개했는데, 그 순간 그의 가족과 교회가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2012년 9월, 심장마비를 겪게 되었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한동안 바텐더로 일하며 제 삶을 정리하려 했습니다. 그때 퀴어(queer) 한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로 이민자 권리운동가이자 플로리다주 아포프카(Apopka) 소재의 희망커뮤니티센터(Hope Community Center) 소장으로 일하던 펠리페 소사-라사발렛(Felipe Sousa-Lazaballet)이었다.
올리버 목사의 블로그를 읽고 공감한 소사-라사발렛은 그를 지역사회 조직가로 훈련하고 싶어 했다.
올리버 목사는 “소사-라사발렛은 예수님이 지역사회 조직가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매우 훌륭한 조직가였죠. 지금도 우리가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라며, “저는 소사-라사발렛을 통해 저는 지역사회 조직 원리를 배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후 우연한 만남을 통해 올리버는 연합감리교회 내에서 성소수자(LGBTQ) 완전 포용을 옹호하는 단체인 화해사역네트워크(Reconciling Ministries Network)에서 홍보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 무렵이 바로 플로리다 탬파에서 열린 총회 시기였습니다.”라고 올리버는 회상했다.
2012년 총회 막바지에 이으러 약 300명의 시위대가 교단의 성소수자 포용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성소수자(LGBTQ)들이 겪었다고 주장한 “조롱과 멸시”에 항의하며 회의장을 점거하고 노래하며 구호를 외쳤다. 당시 교단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 행위는 기독교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으며, 이 조항은 2024년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열린 총회에서 폐지되었다.
“저는 플로리다 레이크랜드(Lakeland)에서 생중계를 보던 중, 다시 교회로 돌아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 받은 소명인 것이죠.”라고 올리버 목사는 말했다. “저는 눈물을 흘리며, 레이크랜드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탬파(총회 현장)로 직접 차를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우연히 화해사역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사람 옆에 앉게 되었지요.”
몇 달 뒤, 올리버 목사는 이 단체에 채용되었다.
그리고 2016년, 그는 올렌데일 연합감리교회에 파송되어 다시 목회 현장으로 돌아왔다.
“당시 감독이었던 케네스 카터(Kenneth Carter) 감독께서 지혜롭게 분별하여 앤디에게 올렌데일에서 사역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곳은 성소수자 공동체뿐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많이 거주하는 지역인데, 감독님이 올리버에게 그 공동체로 들어가 섬길 수 있는 아름다운 선물을 주신 셈이지요.”라고 네이플스에 소재한 코너스톤(Cornerstone) 연합감리교회를 담임하는 올리버 목사의 오래된 친구이자 멘토인 로이 테리(Roy Terry) 목사가 말했다.
“올렌데일은 우리 주의 그 어느 지역보다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는 곳입니다. 감독님은 사실상 올리버 목사에게 ‘당신이 하던 일을 계속해 보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목회자로 복귀한 올리버 목사는 올해 연합감리교 자료보관·역사위원회 총무인 애슐리 보건 박사가 출간한 책 《웨슬리안 바일-텔러티: 감리교 정체성의 심장을 되찾다(Wesleyan Vile-tality: Reclaiming the Heart of Methodist Identity)》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역자 주: Vile-tality는 활력을 의미하는 ‘Vitality’와 추악하다 또는 비열하다는 말을 의미하는 ‘Vile’을 조합한 것으로 존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보건 박사가 조합한 단어다.)

“존 웨슬리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공간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추악하다(vile)’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올리버 목사는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 목사에 대해 말했다.
이어 그는 “저 역시 그런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고 느낍니다. 올렌데일에서 사역하며, 그런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르기도 했다. 올리버 목사는 지난 8월 29일, 플로리다 교통국 직원들이 흑인역사박물관 앞 아스팔트에 ‘흑인 역사는 중요하다(Black History Matters)’라고 쓰인 사인(mural)이 공공의 안녕을 해친다는 이유로 지우려는 것에 항의하며 그 위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다 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되었다. 유죄가 확정되면 최대 1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또한 그는 플로리다주 에버글레이즈(Everglades)에 있는 수용 시설인 이른바 ‘악어 알카트라즈(Alligator Alcatraz)’와 잭슨빌 서쪽 ‘추방 창고(Deportation Depot)’ 앞에서 매주 시위를 이끌고 있다. 이곳들은 대부분 범죄 혐의조차 확인되지 않은 서류 미비 이민자들이 수용되어 있다.
보건 박사는 올리버 목사의 이러한 활동을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감리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불공정하고 억압적인 제도에 맞서는 비폭력 시위, 그리고 모든 이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드는 일은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인들이 했던 일입니다. 저는 올리버 목사와 다른 연합감리교회들이 교회 밖에서 이런 사역을 이어감으로써 오늘의 세상에 감리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플로리다 연합감리교회 목회자들, 이민자를 향한 억압에 맞서다
패터슨 기자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연합감리교뉴스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인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4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