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공동체에서 성찬 공동체로

김선중 목사(남밀워키연합감리교회, 위스콘신)

이사야는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진통하는 산모로 묘사했다(사 42:14).     

마이클 프로스트와 크리스천 라이스도 그들의 공동 저서에 현재 상황을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낳으시려는 것이라 주장한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계획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우리의 이웃들이 사는 도읍과 마을로 들어가 함께 거주하며, 전심을 다해 소명을 감당하고, 만물을 바르고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그들의 말이 새로운 무게로 다가온다. 우리가 처한 새로운 상황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생활신앙에 초점 두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너희가 교회로서 모일 때에”라고 표현한다(고전 11:18). 

그는 교회가 건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살아내고자 하는 이들이 모여 이룬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됨의 의미는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실현되어야 한다.

평생을 바쳐 성배를 찾았으나 실패한 왕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궁정의 광대(court jester)가 왕의 목마름을 알아채고 침실 곁의 물잔에 물을 담아 왕에게 주었고, 그 물을 마신 후 왕은 상처가 씻은 듯이 나았다. 왕이 물잔을 바라보니 그 잔은 자신이 평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성배였다. 광대가 왕의 목마름을 볼 수 있었을 때, 그는 왕의 목마름뿐 아니라 왕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고, 평범한 물잔도 성배로 변화시켰다. 이 이야기는 성(聖)과 속(俗)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생활신앙을 통해 우리가 실현해야 할 교회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병이어 사건 (요 6:1-15)을 바탕으로 한 “성찬 공동체(Eucharistic community)”로서의 교회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에스-헤르토겐보쉬 성가대석과 일반석 사이의 칸막이 일부. 조각, 코엔라드 반 노렌버치. 1600-1613. 빅토리아 & 알버트 뮤지엄, 런던.에스-헤르토겐보쉬 성가대석과 일반석 사이의 칸막이 일부. 조각, 코엔라드 반 노렌버치. 1600-1613. 빅토리아 & 알버트 뮤지엄, 런던.

 

성찬 공동체의 범위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다. 

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자칫 이기적인 “심리적 거리두기”의 알리바이로 악용되어, 차이를 차별과 혼동하고, 나와 내 편 그리고 우리 편만 돌보는 범위 제한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어릴 때 친구 집에서 함께 식사할 때의 기억이다. 밥을 절반쯤 먹으면 친구 어머니께서는 “한 그릇 다 먹어라.”라고 하시며 밥그릇에 물을 부어주시곤 하셨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지만 그대로 남길 수가 없어 억지로 다 먹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내가 밥 한 그릇을 다 비워내듯이 상대방 역시 밥 한 그릇을 다 비워내도록 함으로써, “상대방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줘야 한다.”는 친구 어머니의 나를 향한 돌봄의 의미가 담겨 있었음을, 그 깊은 뜻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부터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잡수신 일에 이르기까지 성서가 예수님의 공동식사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살리고 돌본다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알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남은 부스러기가 12 광주리를 채운 반면, 공관복음서의 칠병이어 기적에는 남은 부스러기가 7 광주리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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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에 주목해보자. 

갈릴리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병이어는 유대 지방에서, 칠병이어는 이방지역에서 일어났다. 12 광주리는 이스라엘의 12지파 모두를, 7 광주리는 모든 이방 민족을 의미하며, 이는 모두 구원의 대상을 암시한다. 오병이어 사건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십자가 사건의 예시로서 모두를 끌어안는 사건이었다. 본문의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는 구절(12)이 그러한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는 나눔의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누군가는 우리의 말에 공허해 하지는 않는지, 우리의 나눔에 배타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무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전부 배불리 먹이셨는데, 우리는 여러 가지 배타적인 기준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고통스럽게 증언하듯이, 우리가 굶주림이 단지 육체적인 고통의 문제를 넘어 정신적인 고통의 문제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면,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은 소박한 바람조차 힘겨워하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과연 얼마나 품어주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게 될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이전에 있었던 헤롯왕의 생일잔치는 폐쇄적인 잔치요, 죽임의 잔치였다. 우리도 분명 헤롯의 잔치를 벌일 때가 있다. 직접 칼을 들고 상대방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을지라도, 빵을 독점하고 혼자만 풍성히 먹는 것은 이웃들의 몫과 생명을 약탈하는 것이요 불공평하고 불의한 세상을 만든다.  

성찬 공동체는 그 범위에 있어 모두를 돌보는 열린 공동체다. 오천 명의 사람들이 푸른 잔디밭에 (10) 마주 앉아 음식을 나누는 잔치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아름답고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성찬 공동체의 목표

성적, 인종적, 계층적, 경제적 약자들은 언제나 역사적 격변기에 가장 큰 희생자로 내몰려왔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적 약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요한복음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홀로 조용히 산으로 물러가셨다(15).라는 내용을 덧붙인다. 또한 6장 22-71절은 그 유명한 “생명의 빵”에 대해 기록한다. “썩을 양식”과 대조되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양식(26-27),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빵(33)에 대한 언급이다. 

우리가 하늘의 빵과 지상의 빵, 둘 중 어느 것을 택하라는 뜻일까? 

광야에서 시험당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 4:4).”라고 대답하신 일을 두고, 도스토에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대심문관은 감옥에 갇힌 예수님을 찾아와, “너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빵을 약속했지만, 과연 하늘의 빵이 땅 위의 빵만할 것인가?”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책망한다. 

자신을 “하늘에서 온 빵”,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온전히 이루는 것(요 4:34)”을 지상과제로 삼으신 예수님의 입장은 무엇인가? 지상의 빵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 지상의 빵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이루는 일에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썩지 않을 하늘의 빵이란 통전적인 구원과 그에 따른 해방을 이루어 영원의 빛에서 바라보는 생명을 얻는 것과 하나님과의 본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실현하며 자유로운 삶을 경험하는 일로 표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결국, 지상의 빵만을 유일한 것으로 추구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했고, 일부는 하늘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그 말씀이 너무 어려워 알아듣지 못하겠다면서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만다 (60, 66). 

우리 교회 공동체도 지상의 빵에 눈이 멀어 궁극적인 하늘의 빵은 외면하고 있진 않은가? 

지상의 빵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추구하는 이들의 신앙을 재가(sanction)하는 데 급급하진 않은가? 

권력의 편을 들고 불의한 사회구조를 방임하고 있진 않은가?

하늘의 빵을 내세우긴 하지만 편향적으로 이용하여 오히려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굶주리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하늘의 빵을 내세우기만 할 뿐, 지상의 빵을 주기는 거부하는 “민중의 아편”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닌가?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배고픈 이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닌 균형을 두고 함께 추구해야 할 문제다.

하늘의 빵을 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지상의 빵만을 실용적으로, 과시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요, 또한 지상의 빵을 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하늘의 빵만을 내세우며 기만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둘 모두를 주관하시면서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추구하신다.

하늘의 빵과 지상의 빵을 함께 나누며 생명을 통전적으로 돌보는 성찬 공동체의 모습, 그것이야말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그들이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라는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모습이다(24:11). 

 

성찬 공동체의 실천 방법

코로나 사태로 인한 집단적 편가름의 광기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와 타인을 동일시하며 나의 삶을 나눔으로 타인의 삶에 동참하는 대신, 타인을 정죄와 희생양 삼기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에 익숙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은 보리빵과 물고기를 “들어”,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나누어” 주셨고(11), 이런 모습을 유월절 저녁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도 보여주신다(마 26:26).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신다는 것은 지상의 빵을 하늘의 빵으로 덧입히는 일이다. 

빵 나눔의 극치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51).” 그렇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심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고, 생명을 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신다. 이렇게 성찬공동체의 본질은 나눔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눔의 기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들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 한 가지를 짚어보자. 

레오나르두 보프는 오늘날 서양의 문제를 “로고스”가 “미토스”보다, “개념”이 “상징”보다 더 중요하게 된 데서 이유를 찾는다. “분류하고 따지고 지배하는” 계산 이성이 문제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어디서 빵을 사야 이 많은 사람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빌립은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고 먹게 하려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의 빵을 가지고도 모자랍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빌립도 “물고기 잡는 집” 이란 뜻의 “벳세다” 출신이다. 물고기에 정통하고 물고기 값을 잘 알며 물고기 한 마리로 얼마만큼의 인원을 먹일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에는 전문가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계산 이성에는 뛰어났으나 이성을 뛰어넘는 일을 헤아리는 데에는 어두웠다. 만약 예수님이 빌립의 계산 이성을 따르셨다면, 오병이어의 나눔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병이어에서 보여준 나눔의 기적은 자기가 가진 보잘것없는 것을 모두 바친 소년으로부터 시작된다. 

박노해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나누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어서 쓰지 않으면 퇴화하고 맙니다. 초라한 애호박 부침하나, 쑥버무리 한 그릇을 울타리 너머로 나누며 살았듯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할지라도 늘 나누십시오. 여유가 있어야 나누겠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나누어 쓰는 능력과 의지가 가난한 것입니다. 가난한 그대로를 나누십시오.” 

박노해의 말은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나눌 때, 풍성하게 남는 나눔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성찬식의 제정은 유월절 저녁에 행해졌고,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찬은 “해방”이라는 주제와 결합된다. 성찬 공동체가 나눔을 실천할 때 어떤 해방이 이루어지는지 알아보자. 

성찬은 출애굽의 해방에 비해 더욱더 완전하고 통전적인 해방을 촉구한다. 

우리의 “빈곤”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나친 “부유함”과 “소비주의”로부터, 우리의 “억압당함”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억압함”으로부터, 우리의 “상처받음”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처 줌”으로부터, 우리의 “소외당함”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외시킴”으로부터의 해방도 촉구한다. 이는 나눔을 실천하는 성찬 공동체를 이룰 때, 우리가 경험하게 될 총체적인 해방의 내용을 말한다. 

성찬의 기능 중 중요한 것은 바로 “기억”의 기능이다. 

성찬의 기억이란, 요하네스 밥티스트 메츠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내용을 변형시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것처럼 동일시하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도전적인 내용 그대로를 현재화한다는 의미에서의 기억이다. 따라서 그 기억은 “위험한 기억”이지만, 역사와 분리되는 것이 아닌, 역사 속에서는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유효하며, 구원과 해방의 힘을 담지하는 것을 말한다.    

 

밥상 공동체에서 성찬 공동체로! 

온전한 생명을 위해 하늘의 빵과 지상의 빵을 동시에 추구하고, 실천을 통해 나눔의 기적을 경험하며, 모두를 품어 돌보는 성찬 공동체야말로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야기된 현 상황을 생활신앙을 통해 이겨낼 수 있도록 교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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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감리교 한영찬송가, 찬송과 예배, COME, LET US WORSHIP,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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