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 번외 편인 <성화와 설교> 시리즈다. 강혜성 목사는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임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1. 둘째 아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의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 품에 안긴 둘째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림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둘째 아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받아 먼 곳으로 떠나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유산을 탕진했으며, 굶주림과 곤궁함에 지쳐 결국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림에서 탕자가 된 둘째 아들의 몰골은 처량하며, 한쪽 발에는 신발조차 없고, 머리카락은 그로 인해 다 빠져버렸습니다.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야단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신발과 옷과 반지를 주면서 그를 크게 환대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에 둘째 아들을 그리면서 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화가로서 성공하여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탕자처럼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모든 돈을 낭비했습니다. 그는 또한 아들과 딸과 아내를 잃어버리는 큰 상실의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돈도 가족도 모두 잃고 나이가 들어 병들고 외로운 가운데, 렘브란트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줄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직전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이 바로 그 탕자이며, 하나님의 용서와 위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이 그림에서 아버지는 커다란 붉은 외투를 입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투는 고단한 나그네가 쉬어 갈 수 있는 장막을 상징하기도 하고,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미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어미새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시편 91:2, 4)
이 그림은, 우리가 탕자처럼 방탕한 삶을 살 때, 또는 바쁜 일상 가운데 지치고 힘들어 좌절할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품과 위로가 필요한 탕자라고 말합니다. 지친 영혼을 이끌고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마치 어미새가 자신의 날개로 새끼들을 품어주듯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앞에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품에서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을 맛보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2. 첫째 아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위로를 일깨워 주는 이 그림이 제 마음에 들어서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찾았습니다. 캔버스에 인쇄한 그림을 찾았는데, 좀 비싸 보여서 망설이다가 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째 설교로 첫째 아들 이야기를 준비하면서는 렘브란트가 첫째 아들과 같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현대 전기 작가들은 렘브란트가 가까이 지내기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후원자, 친구, 심지어 자신의 가족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했으며,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유형의 사람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아마도 첫째 아들을 그리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장자이기에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고 가문의 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아버지를 닮은 첫째 아들을 그렸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수염을 하고 있으며, 아버지처럼 붉은 외투를 걸치고 있고, 얼굴도 아버지를 무척 닮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외모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향해 몸을 숙인 채 껴안으려고 하지만 첫째 아들은 꼿꼿이 서 있으며, 아버지는 탕자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포옹하지만, 첫째 아들은 두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측은함과 사랑의 얼굴로 바라보지만, 첫째 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못마땅하며, 아버지의 재산을 또 가져갈까 봐 경계하면서 냉담하게 동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고 불평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겉모습은 닮았지만, 아버지의 성품을 닮지는 않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를 원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물려받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자신을 닮은 아들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못내 마음 아프지만, 그런 아들을 조용히 타이르면서 잔치에 같이 참여하라고 권유합니다.
그림에서 아버지와 탕자 위로 빛이 쏟아지는데, 이는 그들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째 아들의 얼굴에도 작은 빛이 어른거리는데, 이는 첫째 아들도 천국 잔치에 초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천국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있기에, 어두움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무책임하게 유산을 탕진함으로써 탕자가 되었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원망하고 불평함으로써 하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낭비한, 마음이 아버지와 멀어진 탕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첫째 아들의 모습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는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생각나게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때때로 우리의 다른 사람을 용서하거나 포용하기보다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질투하는 모습이 마치 첫째 아들의 모습과 같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비유에서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이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렘브란트는 의도적으로 두 아들을 같은 장소에 그렸습니다. 왜냐하면, 렘브란트는 자신이 첫째 아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첫째 아들도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탕자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품이 필요한 둘째 아들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워야 하는 첫째 아들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교만하거나 냉담하며,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늘 사랑하시며, 우리를 잔치에 초대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3. 주인공은 아버지
첫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그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마존에 가서 그림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크기가 그리 크지도 않은데 가격이 비싸 보입니다. 또다시 이 그림을 사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도, 내 생일도 아닌데, 이 그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살 좋은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구매를 또 포기했습니다. 그러다 그림 속 아버지에 대한 세 번째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그림이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복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캔버스 구조상, 이 그림의 가운데에는 중심인물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림 속 모든 인물이 탕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탕자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진정한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입니다.
이 그림은 빛의 근원이시며, 사랑과 용서와 연민과 화해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림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의 이름을 ‘돌아온 탕자’가 아닌 ‘환영하는 사랑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17세기 영국의 유명한 목사이자 작가인 매튜 헨리(Matthew Henry)2는 이 비유를 “가난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로움을 드러낸 위대한 스토리”라고 칭송했습니다.3
사실 탕자 이야기는 당시 개신교 화가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는 주제였으며, 많은 화가가 탕자의 비유에 관한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렘브란트도 젊어서부터 탕자의 비유에 대한 그림을 여러 번 그렸는데, 렘브란트와 다른 화가의 큰 차이점은, 렘브란트는 탕자의 비유에 대한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은 단순히 탕자의 비유에 관한 그림이 아니라 바로 그의 영적 여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동대 미술학과 서성록 교수는 렘브란트가 그린 수많은 탕자에 관한 그림을 연구하면서, 렘브란트가 젊었을 때 그린 탕자의 그림은 방탕한 탕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렘브란트가 노년에 그린 이 그림은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라는 이 그림을 보면 아버지가 탕자를 감쌀 뿐 아니라 그림을 보는 우리도 초대하고, 우리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통해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감싸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이며, 우리가 보아야 할 탕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초대하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바로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4. 아버지의 사랑

서성록 교수는 이 그림이 자신의 과오로 부서져 버린 영혼이 유일하게 의존할 곳은 ‘하나님의 은총’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히 성경 이야기를 그린 ‘종교적인 그림’이 아니라, 타락과 불순종, 용서와 관용,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 등 성경의 복음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은총의 회화’라고 말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은 우선 자녀들에게 선택권의 자유를 주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요구할 때 거절하지 않았고, 또 그 유산을 가지고 떠날 때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아 나섰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에서 주인은 동전을 찾기 위해 열심히 방 이곳저곳을 뒤지지만,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를 찾아 떠나지 않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불순종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선택권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동전은 목자나 주인을 찾아올 수 없지만, 탕자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작은아들의 모습에 마음 아파하며, 그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내내 기다립니다. 그림을 보시면, 아버지의 모습은 구부정하며 지치고 연약해 보이는데, 이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선택이라는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불순종을 선택할 자유도 포함하기에, 그러한 자유를 준 하나님으로서는 마음 아픈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자녀를 통해 숱하게 경험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음식 골고루 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운동하며, 친구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며, 신앙생활도 잘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이것저것 몇 마디 하면, 자녀들은 그것을 듣기 싫은 잔소리라고 짜증 내며, “날 그냥 나눠(Leave me alone)”라고 고함치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참 서운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북한군보다 더 무서운 게 중2병이라고 하는데, 사춘기를 지나는 자녀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탕자는 집 나간 사춘기 자녀와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자녀를 어머니 아버지는 잠도 못 자면서 매일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깨닫고 돌아오는 선택을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탕자 이야기가 보여주는 두 번째 아버지의 사랑은 바로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탕자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먼 곳에서 오고 있을 때 그를 보고는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가 그를 맞이합니다.
또 큰아들이 불평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큰아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서 그를 달래고 잔치에 함께 가자고 초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늘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며,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 이전에 독생자 예수를 통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음으로 그분을 선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탕자를 껴안고 있는 아버지의 외투는 빨간색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탕자인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돌아가셨으며, 이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 4:10 절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탕자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세 번째 아버지의 사랑은 바로 우리 모두를 골고루 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용서하고, 환영하며, 그를 회복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었다면, 첫째 아들에게는 그의 원망과 불평을 야단치지 않고 말없이 들어주고 달래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32절)라고 말하는데, 이는 둘째를 위해 잔치를 베푸는 것이 그를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잃었다가 얻었기에 잔치를 베푸는 것이며, 너는 나와 항상 같이 있고, 또 나의 모든 것이 너의 것이 아니냐는 말로 아들에 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사실, 성경에는 형제간의 갈등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그 중심에는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형제들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은 안타깝게도 형제 살인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자, 질투와 시기에 사로잡힌 첫째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가인이 최초 살인이라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을 마치 하나님이 자신은 사랑하지 않고 아벨만 사랑한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서 잔소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가 잘못할 때 징계하시는데, 이는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히 12:6)라고 말씀하신 거처럼, 우리가 살다 보면, 우리는 과분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게 되며, 이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 살다 보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겪고, 징계를 받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또 딱히 회개할 것이 없으면 우리를 연단 하기 위해 주시는 시련이라고 생각하면서 힘든 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을 신뢰하고, 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5. 아버지 되기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은 우리가 화면으로 봐서 그림의 실제 크기를 잘 모르는데, 이 그림은 262cm × 205cm(103in × 81in) 크기의 대작입니다. 그림 속 인물의 크기가 실제 사람의 크기와 같으며, 그래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한 사람, 한 사람과 대면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몇 주나 몇 달 만에 그린 것이 아니라, 6년 정도 구상했고, 죽기 전 2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 위에 한 사람, 한 사람 그릴 때마다 그 인물에 대해 수만 번 생각했고, 또 자신이 얼마나 그림 속 그 인물과 유사한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캔버스 위에 탕자를 그리면서 자신의 삶이 마치 탕자와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을 그리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마치 첫째 아들과 같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렘브란트는 손을 들어 캔버스 위에 아버지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탕자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자신에 대해 수천수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림 속 탕자의 아버지가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림에서 보여주는 아버지의 얼굴은 렘브란트의 육신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영혼,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먼저 보낸 찢기는 아픔을 간직한 한 아버지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렘브란트는 1634년에 자기보다 6살 어린 사스키아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예쁘고 착하며 부유하며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고 합니다.4 하지만 그녀가 1636년에 낳은 첫아들은 얼마 못 가 죽습니다. 1638년에는 딸을 낳는데, 이 아이 역시 한 달도 살지 못하고 죽으며, 1640년에 낳은 딸도 곧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다가 1641년에 드디어 아들 티투스가 태어났습니다. 그도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허약했으며, 머지않아 병에 걸려서 죽을 줄 알았는데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다른 자녀들이 다 어린 나이에 죽고, 또 아내 사스키아마저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이후, 티투스는 그에게는 단 하나 남은 아들이었습니다. 그 티투스가 자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티투스는 전염병에 걸려 앓아눕게 됩니다.
렘브란트가 죽기 1년 전인 1668년 아들 티투스는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품에 안겨 죽습니다. 렘브란트는 죽어가는 아들을 껴안으며, 수많은 시간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이고, 비통한 마음을 부여잡고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모습이 캔버스 위에 나이 들고 지치고 구부정하며,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한 노인의 모습을 한 아버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마치 탕자와 같은 자신의 아들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아버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렘브란트는 젊어서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한창 인기가 있을 때는 첫째 아들처럼 까칠하고 교만했지만, 인생의 험난한 과정을 지나 자녀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아들이 건강하게 살아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우리가 때론 탕자 같고, 때론 첫째 아들처럼 행동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하고, 아버지를 닮아야 하며, 아버지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위기 11:45 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 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삶의 목적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렘브란트는 바로 이 그림에서 비록 우리의 삶이 탕자 같고, 우리의 모습이 첫째 아들과 같이 교만하고 불평하는 모습이지만,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그러한 삶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고자 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한 가지를 가르쳐주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눈입니다.
성경은 아버지를 막대한 재산과 많은 종을 가진 매우 부유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아버지의 모습을 맹인에 가까운 노인으로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나이가 들면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닌 노인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형용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겪은 후 외롭고 남루한 노인이 된 그는 시각장애인을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모습을 보는 특별한 존재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돌아온 탕자인 아들을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알아보는 노인으로 아버지를 묘사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세상적인 인간의 눈으로 탕자를, 그리고 우리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아마 징계받아 마땅한 자녀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적인 육신의 눈이 아니라 바로 영적인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기를 즐거워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진정으로 닮고자 한다면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영적인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버지처럼, 한 영혼 한 영혼을 품을 수 있는 진정한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탕자의 이야기에 관한 이 그림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처럼 되라는 부름도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탕자의 삶에서 벗어나, 원망하고 불평하는 첫째 아들의 모습에서 벗어나,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분은 Youtube에서 “NEW Breathe Worship의 “탕자의 노래”라는 찬양을 들어보시길 권유합니다.)
참고 자료
1. 미국 교회 목회를 할 때, 여름이면 책 한 권을 선정해서 교인들에게 읽기를 권유하고, 그 책을 바탕으로 본문과 묵상으로 설교하곤 했습니다. 이 글은 누가복음 15장, 헨리 나우웬의 책 <탕자의 귀환>,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를 바탕으로 쓴 설교문입니다.
2. 주요 참고서적: Henri Nouwen의 <탕자의 귀환>, 포이에마 2009. 그림에 관한 설명 중 대부분은 이 책에서 인용되었습니다.
3. 서성록,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연구’를 google 하면 논문 PDF 찾을 수 있습니다
4. 서양화가 최연욱의 렘브란트의 사랑 사스키아 그리고 그녀의 유언
5. 탕자의 아버지와 관련된 Youtube 추천 찬양 음악: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by 한성교회, 김윤진 간사
주) 1. 헨리 나우웬, p. 179
2. 헨리 나우웬, p. 179
3. 서성록, p 2
4. 최연욱 ‘렘브란트의 사랑 사스키아 그리고 그녀의 유언’ 네이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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