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대한민국 21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연합감리교뉴스가 ‘기독교와 대선’이라는 주제로 3명의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오늘은 그 세 번째로 북일리노이 연회의 시카고템플에 에게 의뢰한 글을 게재한다. 연합감리교뉴스는 교단과 사회 각 전반의 이슈에 대한 다양한 논평을 게재하고 있다. 논평은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며, 연합감리교뉴스의 의견이 아닌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연합감리교뉴스는 언제나 다양한 의견을 담은 글을 환영한다.)

2015년, 그러니까 10여 년 전 대구에 있는 고모님 댁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온 조카에게 임금님 수라상 같은 만찬을 뚝딱 차려내신 고모는 저희 집안에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이 되셨고, 이후 보수적인 교단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다’라는 교회법과 싸워 결국 목사 안수까지 받은 여장부세요. 집안의 대소사를 살뜰히 챙기고 교회 일에도 헌신하시는, 제 눈에는 원더우먼 같은 알파걸이십니다.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른이시지요. 오랜만에 고모를 뵙고 그 댁에 머무르며 무한히 따뜻한 사랑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고모, 고모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뒤 저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시차 때문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어요. 말똥말똥 눈만 뜬 채 누워 있는데, 거실에서 두 분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만나 결혼하신 두 분은 지금도 한 교회의 시무장로와 목사로 일하며 신앙도 돈독하고 사이도 한결같으세요. 하루를 돌아보며 나누는 두 분의 낮은 대화 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와, 슬며시 웃으며 음악을 듣듯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모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한마디 하시는 거예요. 목소리가 커서 방 안에 있던 저도 정확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박근혜 각하께서 그러시면 안 되지!”
함께 뉴스를 보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둔하는 고모부 말씀에 고모가 답하신 것이지요. 고모부는 고모가 박 전 대통령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는데 약간 놀라신 듯했고, 저는 그보다 ‘각하’라는 표현에 더 놀랐습니다. 그 표현이 주는 시대착오적 감각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고모와 제가 정치적 신념이 다르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표현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뚜렷이 실감했습니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로도 저는 고모와 정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서로 너무 다른 전제와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중간 지점을 찾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정치 문제로 가족 간 관계가 소원해지고, 잔칫날이어야 할 명절이 언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정치 이야기는 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요. 정치는 그만큼 날카로운 대립 지점이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주제인 듯합니다. 교회에서도 정치색이 다른 이들 간 대화가 어색하게 끝나는 광경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왜 더 갈라지고 대립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방하는 걸까요?
그런데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평화에 대한 관점이 다르게 들립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로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으면, 세 사람이 두 사람을,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대적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어머니가 딸을, 딸이 어머니를... 서로 대적하게 하려 함이로다."
(누가복음 12장 51-53절)
이 구절은 혼란스럽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를 진정한 복음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강한 도전이라 생각합니다. 복음은 삶을 흔드는 힘입니다. 그저 안주하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선으로 삶을 돌아보고 복음에 어긋나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부르심이지요.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 시도는 때로는 원하지 않더라도 분열과 충돌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연합감리교 감독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분쟁과 소란이 없는 상태가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조화롭게 사는 것이 참된 평화”라고 선언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정의가 인간과 자연, 창조물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전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비전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세상은 조화는커녕 끝없는 분쟁과 전쟁, 다툼과 반목으로 가득 찬 듯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다름을 견디며 진리를 향해 걸어갈 수 있을까요?

이번 한국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대선 당일 밤, 결과를 지켜보며 잠을 이루지 못한 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실망하고, 또 어떤 분들은 희망을 보았겠지요.
저는 이 선거 결과에서 한국 사회가 여전히 변화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다는 신호를 느꼈습니다. 한국의 계엄 선포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미국 교인들이 제게 “지금 한국 괜찮은 거 맞아요? 계엄이라니, 지금 독재 상황인가요?”라고 물어왔습니다. 설명할 말을 따로 찾지 못한 저는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촛불과 야광봉을 들고 노래하며 시위하는 한국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교인들이 감탄할 때는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창과 무력에 맞선 야광봉과 촛불, 춤과 노래라니요.
우리는 빈곤과 불평등, 기후 위기와 같은 문제들을 외면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쟁과 충돌은 어쩌면 더 깊은 평화로 가는 진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대한민국이 야광봉과 촛불로, 춤과 기쁜 노래로 그 진통을 멋지게, 분쟁을 아름답게 헤쳐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권력에 안주하거나 환상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고, 참여하고, 감시하며 동행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동시에 예언자적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필요할 땐 함께하고, 잘못된 길을 갈 땐 멈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 속 선지자들의 자세였고, 오늘날 우리가 이어가야 할 태도입니다.
신앙인은 권력의 방향보다 그 아래에서 울리는 고통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예수께서도 종교 권력과 제국의 폭력에 맞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지요. 우리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진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지 끊임없이 참여하며 연대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누구든, 교회는 늘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약자의 편에 서야 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회복을 위한 기도의 자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선거 이후의 시간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길이 시작되는 지점이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고모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이구 우리 현 목사님~” 깍듯이 조카를 목사라고 불러주며 전화를 받으시는 고모의 목소리는 여전히 정답고 따뜻했습니다.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저는 난생처음으로 고모에게 정치 이야기를 꺼내보았습니다.
“고모, 이재명 씨가 대통령이 되셨어요.”
그러자 고모는 환한 목소리로 답하셨습니다. “그래,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드려야겠제. 열심히 일해서 좋은 세상 만들어달라꼬.” (고모는 아주 예쁜 대구 사투리를 쓰십니다.)
저에게는 그 한마디가 충분한 대답이었습니다. 고모가 생각하는 ‘좋은 세상’과 제가 바라는 세상이 완전히 같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그 세상을 바라는 마음만은 같다는 믿음이 있기에 고모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귀한 통로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선지자적 사명이, ‘좋은 세상’을 향한 소망이 촛불과 야광봉과 함께 춤추며 나아간다면,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올 것을 믿습니다. 아멘.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인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