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탕자 이야기 2: 첫째 아들 이야기

누가 15:1-3, 25-32(마태21:28-31)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 번외 편인 <성화와 설교> 시리즈다. 강혜성 목사는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임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1. 두 아들 이야기

강혜성 목사, 사진 제공, 강혜성 목사.강혜성 목사, 사진 제공, 강혜성 목사.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기독교인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우리는 탕자인 둘째 아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 비유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아들인 첫째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이 이야기의 제목은 사실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아니라 ‘두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보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이 캔버스 왼쪽에 있습니다. 만일, 아버지와 둘째 아들만이 이 이야기의 유일한 주인공이라면 렘브란트는 그들을 캔버스 중앙에 그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화면 한쪽에 있으며, 다른 쪽에는 굳건하고 단호하게 서 있는 또 다른 주인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첫째 아들입니다. 이 그림은 아버지가 탕자인 둘째 아들만 잃은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잃어버림’이란 관계의 단절(broken relationship)을 의미합니다. 양들이 길을 잃어버려서 목자와의 관계가 단절되듯이, 우리는 둘째 아들의 ‘잃어버림’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하며, 그 유산을 가지고 멀리 떠남으로써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이방의 땅에서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산을 탕진하고는 굶주린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돼지들이 먹는 음식을 먹으며 비참한 생활을 하던 그는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와 용서를 구합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긍휼히 여기며, 그를 껴안고 용서하며,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렘브란트가 죽기 직전인 1668~1669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일부분.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이며,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글에서 인용하는 손과 신발 그리고 검의 모습을 더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그림의 밝기를 조정했다.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렘브란트가 죽기 직전인 1668~1669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의 일부분.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마지막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이며,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Hermitag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글에서 인용하는 손과 신발 그리고 검의 모습을 더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그림의 밝기를 조정했다.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 탕자의 이야기는 고전적인 인간의 타락과 회개 그리고 회복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성경의 기본적인 줄기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아버지의 집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타락). 아담과 하와로 대변되는 인류는 세상에서 힘들게 살면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기나긴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회개의 과정). 그리고 인류의 이러한 여정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회복).

범위를 좁혀서 구약의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되고, 그들이 고통 가운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는, 타락과 회개 그리고 회복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범위를 좁혀 한 인간 야곱을 봐도, 그에게서 우리는 똑같은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그러고는 형이 무서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는,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살다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탕자는 타지에서 실패한 삶을 살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다면, 야곱은 어느 정도 성공한 모습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야곱과 탕자를 통해 보여주는 성경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바로 아버지 집으로의 돌아가는 것(returning home)이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보면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고 품어 안음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살아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데,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둘러싸고 있는 빛은 바로 그들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아버지와 첫째 아들 사이에는 어두움이 있는데, 이는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분리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첫째 아들은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벌주지 않고, 오히려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에게 화를 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둘째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그 순간, 아버지와 첫째 아들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며, 이제 첫째 아들이 ‘잃어버린 아들(lost son)’이 됩니다.  

2. 출생 순서(Birth Order)

알프레트 아들러, 사진 출처, 위키백과.알프레트 아들러, 사진 출처, 위키백과.

탕자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은 “왜 탕자는 첫째가 아니라 둘째일까? 왜 첫째 아들은 동생이 살아서 돌아온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궁금해하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궁금증에는 심리학자들의 이론이 도움이 됩니다.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프로이트, 융과 더불어 근대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리학자입니다. 그의 많은 이론 중에 ‘출생 순서 이론(Birth Order Theory)’이라는 게 있습니다.  

출생 순서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태어나는 출생 순서가 그 사람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첫째는 처음 태어난 아이기에 그 집안의 가문을 이어갈 장자로 부모의 극진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동시에 기대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장자인 첫째 아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때론 자만하기도 하며, 또 책임감이 있으며, 그 책임감의 무게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장자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 가문을 이어가야 하기에, 부모님 말씀에 싫어도 ‘No’라고 하기를 주저해 순종적으로 보이는 한편 위선적이기도 합니다. 첫째 아들은 이성적이며, 안정적인 직업을 좋아하고, 법을 준수하기에 공무원이나 법률가, 정치인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반면, 둘째는 부모가 두 번째로 가진 아이기에 좀 더 여유 있게 키우죠. 그래서 둘째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관심을 덜 받으면서 자랍니다. 둘째는 첫째인 형이 잘못했을 때 그 대타로 가문을 이어갈 수 있기에, 형의 그늘에서 늘 기회를 엿봅니다. 그와 형은 사이좋은 척하는 경쟁 관계이며, 둘째는 형의 그늘에서 부모의 관심을 더 받기 위해 노력하는데, 때론 관심을 더 끌고자 말썽을 부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둘째 아이의 운명을 프랭크 설로웨이(Frank Sulloway)는 <Born to Rebel>이라는 책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예가 바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둘째 아들인 야곱은 감정적이고, 자유로우며, 형을 속이면서까지 장자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자, 집을 떠나 독립적인 생활을 꾸려가지요. 이처럼 둘째는 첫째보다 관습에서 자유롭고 더 진취적이고 분방합니다. 창작가나 기업가 중에 둘째가 많은 이유일 겁니다.  

이런 첫째와 둘째의 성격을 생각하면 성경 이야기가 좀 더 색다르게 이해가 됩니다.

마태복음 21:28-31절을 보면 예수님이 비유로 또 다른 두 아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포도원집 아들인데,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에 한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하지만 가기 싫어서 가지 않습니다. 반면 다른 아들은 가기 싫다고 말하고는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합니다. 자, 그럼, 누가 첫째이고 누가 둘째 아들일까요?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가겠다고 하고는 가지 않고,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갔다고 합니다. 큰아들은 포도원에 일하러 가기 싫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가 장자의 책임과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반면, 둘째는 가문을 이어갈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니 보다 솔직하게 행동하며, 포도원에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싫어서 ‘No’라고 합니다. 첫째 아들은 의무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기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그래서 때론 위선적이기도 합니다. 반면 둘째 아들은 책임감은 적지만 솔직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이유로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방문했을 때, 한 자매는 부엌에서 일하고, 다른 한 자매는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부엌에서 일하고, 누가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장녀인 마르다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것은 맏딸로서 손님을 접대할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반면, 둘째 마리아는 눈치도 없이 예수님 옆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맏딸로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을 하며, 마리아는 둘째이기에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큰아들은 장성하면 장자로서 가문을 이어받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는 것은 둘째이지 첫째가 아닙니다. 그리고, 유산은 두 아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습니다. 가문을 이어받는 첫째가 보통 2배 이상의 유산을 물려받으며, 둘째는 일정 정도 독립할 수 있는 자신의 몫을 받을 뿐입니다. 첫째 아들은 가문을 잇고 더 빛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면, 둘째는 독립해서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성공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입니다. 둘째는 언젠가는 집을 떠나야 하는 운명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을 달라고 요구하는 둘째 아들의 요구가 좀 무례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유산을 주는 이유는 둘째 아들은 언젠가는 독립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동생인 야곱은 집을 떠났지만 성공해서 돌아왔고,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철이 없었지만, 예수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된 작은아들은 무책임했고, 무능력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탕자가 된 이유는 자신의 몫을 가지고 집을 떠나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을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동생이 돌아온 순간 순종적이었던 첫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를 내면서 좋아 보였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둘째가 집을 나갔던 것처럼, 이제는 첫째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납니다.

3. 바리새인과 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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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비유일까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비유 3가지를 말씀하셨는데, 바로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15:1-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소위 율법을 잘 준수한다고 믿는 자들이며,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의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설명하자면, 그들은 양 우리에 잘 있는 99마리의 순한 양이며, 잃어버리지 않은 9개의 드라크마이고, 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첫째 아들입니다. 반면, 세리와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길을 잃은 어린 양이며, 잃어버린 한 냥의 드라크마 동전이며, 유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경 말씀대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자신들과 먼저 식사를 해야지 어떻게 죄인들을 먼저 찾아가느냐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은 아버지가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벌이는 것과 같으며, 이에 첫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불평하듯,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불평합니다. 그들의 불만은 첫째 아들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15:29-30)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서 그들과 음식을 먹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잃어버린 자에 관한 3가지 비유를 하는데, 세리와 죄인은 잃어버렸다가 찾은 자들이기에 그것이 기뻐서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입장은 탕자의 아버지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이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눅15:24)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그림을 보면, 큰아들의 얼굴에도 하나의 빛이 비치고 있는데, 이는 그도 천국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기를 거부하듯이, 첫째 아들은 탕자인 동생과 함께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합니다.

첫째 아들은 모든 유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들이 세리와 죄인이요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탕자라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기를 원하지만, 아버지의 긍휼한 마음은 배우지 못한 교만한 자들입니다.

4. 우리 안에 있는 첫째

우리는 탕자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필요한 탕자에 많이 비유하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첫째 아들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무책임하고 실수하며, 방황하거나 지치고 힘들 때, 우리는 하나님의 품이 필요한 둘째 아들입니다. 반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기쁨과 감사보다 교만에 빠질 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 사랑과 긍휼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더 내세울 때,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물었습니다. 모두가 손을 들고는 “네! 저요, 천국에 가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는데, 톰이라는 한 소년은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그의 반응이 궁금해서 “톰! 너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톰은 “네! 천국은 가고 싶어요. 그런데 이 아이들과 함께 가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톰이 천국에 가고 싶지만 같은 반 친구들과는 함께 가고 싶지는 않듯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식사하고 싶지만, 세리나 죄인들과는 함께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준비한 잔치에 참여하고 싶지만, 탕자가 된 동생과 함께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톰이나 바리새인들은 다 같이 자만하고 이기적인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는 둘째 아들입니다. 위로 누나와 형,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 둘이 있습니다. 누나와 형이 있으니 책임감에서 자유롭고,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렇게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기에 교회에서는 마치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 모임에 열심히 참석했고, 중고등학생 때는 임원으로, 또 회장으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신실한 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고등학생이던 어느 여름이었습니다. 여름 학생 수련회에 참석해 열심히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고, 또 늦게까지 기도했는데, 그때 몇몇 학생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보다 교회 오래 다니고 믿음이 좋은 학생이 방언하면 나도 언젠가 방언을 하겠지라고 생각하겠는데, 그때 방언을 받은 학생은 제가 생각했을 때, 교회에 나보다 오래 다니지도 않았고, 똑똑하지도, 모범적이지도, 그렇다고 믿음이 좋은 학생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방언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이고 선물이면 당연히 당시에 학생회 총무로, 회장으로 섬기고 있는 내가 받았어야지 어떻게 저런 학생이 방언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저런 아이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그 은사는 별로 좋지 않은 것이 분명해!”라고 폄하하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당시 저의 행동은 "이 아이들과 함께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어린 톰과 같았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더 좋다고 자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바리새인과 같았으며, 탕자인 동생보다는 아버지의 관심을 더 받아야 한다고 투정하는 첫째 아들과 같았습니다.

5. 첫째 아들의 돌아옴

둘째 아들은 방탕한 자신의 생활을 회개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오면, 아버지 품에서 구원을 받고 자녀로서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잘못은 분명하기에 회개하기도 쉬우며, 또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또한 크게 느껴집니다. 반면, 첫째 아들의 잘못은 크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적이 없으며,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순종적이었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나타났을 때, 첫째 아들은 자기 믿음의 한계와 위선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덧 아버지의 마음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고 불평과 원망 가운데 방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첫째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 31-32)

아버지의 이 말은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두 가지 깨달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자신이 아버지의 충분한 사랑과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1절에서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자신을 향해 불평하는 첫째 아들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달랩니다. 사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누려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축복이었고, 평소에도 부족함 없이 아버지의 재산이 주는 부요함을 누려왔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했는데, 송아지를 잡는다는 것은 잔치 규모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렇다고 둘째 아들이 혼자 송아지 고기를 다 먹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혼자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고기는 첫째 아들에게도 매년 생일이나 기념일이면 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둘째를 위한 잔치의 규모에 놀라서 자신이 지금껏 아버지 집에서 누려온 축복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합니다.

탕자는 회개함으로써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다면, 첫째 아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를 깨달을 때,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은혜”라는 찬양 가사는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소···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였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작은 은혜의 순간이라도 기억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계속 함께하며 그분의 축복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첫째 아들은 장자이기에 아버지의 물질적인 유산뿐 아니라 아버지의 긍휼한 마음의 유산을 배워야 합니다. 32절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첫째 아들은 잔치의 규모를 보면서 마치 아버지가 자신보다 둘째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둘째가 첫째보다 착하거나 믿음이 좋거나 똑똑해서, 또는 더 사랑해서 잔치를 벌여준 것이 아니라,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와서 잔치를 벌인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해 줍니다.

아버지에게는 첫째든 둘째든 다 똑같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지금 둘째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이유는 그가 뭔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힘든 삶을 살았고, 죽었다가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둘째를 아버지의 유산을 더 차지하려는 경쟁 상대가 아닌, 이해와 돌봄과 긍휼이 필요한 동생으로 봐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의 상한 마음을 달래면서, 같이 잔치에 참석하자고 초청합니다. 천국 잔치란 참석하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잔치에 참여하라는 아버지의 요청에 대한 첫째 아들의 대답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첫째 아들은 집 밖에 있고, 둘째 아들은 집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리면서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의도적으로 같은 장소에 두 아들을 그렸는데, 그 이유는 첫째 아들도 아버지와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도 둘째와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바람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방탕한 생활로 낭비하여 탕자가 되었다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인 긍휼한 마음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은혜를 모르는 영적 탕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할 탕자들입니다. 반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 집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과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때론 원망과 교만 가운데 길을 잃은 첫째 아들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품에 온전히 거하는 방법은, 그분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으로 형제자매를 용서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을 배워서 다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분은 Youtube에서 “은혜”라는 찬양을 들어보시길 권유합니다.) 

참고 자료

1. 미국 교회 목회를 할 때 여름이면 책 한 권을 선정해서 교인들에게 읽기를 권유하고, 그 책을 바탕으로 본문과 묵상으로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이 글은 누가복음 15장, 헨리 나우웬의 책 <탕자의 귀환>, 렘브란트의 그림 ‘돌아온 탕자’를 바탕으로 쓴 설교문입니다.

2. 주요 참고서적: Henri Nouwen의 <탕자의 귀환>, 포이에마 2009

3. ‘Birth Order Theory’는 google에서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기억해 적은 것이라 따로 참고도서가 없습니다.

4. 첫째 아들 관련 추천 찬양 음악: ‘은혜’ by Markers Worship

관련 기사 시리즈 보기

렘브란트의 탕자 이야기 1: 둘째 아들 이야기

렘브란트의 탕자 이야기 3: 아버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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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8일부터 이틀간 열린 제4차 KMC-UMC-WMC 한반도 평화를 위한 라운트테이블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예수님의 눈물: 한인 디아스포라의 메시아적 희망과 해방 3

정희수 감독은 예수의 눈물이 한인 디아스포라에게 친숙한 신학적 담론을 형성하여, 고통과 분열 속에서도 신앙을 통해 새로운 자아와 정체성을 찾으며, 트라우마와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희망과 화합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이 글은 정 감독의 글 3편 중 3편이다.
사회적 관심
재외동포분포현황, 사진 출처, 기독일보.

예수님의 눈물: 한인 디아스포라의 메시아적 희망과 해방 2

한인 디아스포라는 단순한 이민자가 아니라, 역사적 고통과 신앙, 민족 정체성, 그리고 탈식민지화에 대한 열망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로, 그들의 삶에는 해외에서의 정체성과 공동체 형성, 조국에 대한 사랑과 이념의 상처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다. 이 글은 정 감독의 글 3편 중 2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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