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이글은 한명선 목사가 연합감리교뉴스에 기고한 영문 투고문을 번역한 것이다.)
“연합감리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사랑하고,
기쁨으로 섬기며,
지역 공동체와 세계 공동체 가운데서
용기 있게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양성합니다.”
제가 처음 제 성격이 내향적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의 말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럴 만도 한 게, 저는 키가 6피트가 넘고, 체중도 200파운드를 훌쩍 넘는 목사이며, 늘 웃음짓고, 설교 중에도 농담을 잘 하고,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저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제 삶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함께해 온 그녀는 저를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녀는 제가 간단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대부분의 주말과 휴일을 그녀와 두 아들과만 보내는지, 그리고 주일 예배가 끝나면 조용히 지하실로 사라지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제가 홀로 문을 닫힌 방에서 몇 시간씩 조용히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고요 속에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내향적이라는 고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종종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보시는 저의 외향적인 면은 대부분… 직업적인 거예요.”
그렇기에 제가 사랑하는 우리 교단의 새로운 비전 선언문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안에 담긴 ‘담대하게’, ‘기쁨으로’, ‘용감하게’라는 세 단어 앞에서 잠시 멈칫했습니다.
그 단어들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더 깊은 의미를, 즉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지에 대한 전제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저는 ‘사명’과 ‘가치’를 구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명은 우리가 무엇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는지를 알려주고, 가치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살아내는지를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합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우리는 성별, 인종, 계급, 국적의 경계를 넘어 포용적으로(inclusively) 그것을 살아내거나, 성경에 기반하여 성경적으로(biblically) 살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지역적으로(locally) 그리고/또는 전 세계적으로(globally) 사명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새로운 비전 선언문에 담긴 세 단어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하도록 초대받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초대가 내성적인 저에게 조용한 우려를 불러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들은 자칫 외향적인 사람들의 이상을 전제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 초대가 따뜻한 손짓이라기보다는 강요하는 기대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수잔 케인(Susan Cain)은 그녀의 책 『콰이어트: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세상 속 내향인의 힘(Quiet: The Power of Introverts in a World That Can’t Stop Talking)』에서 현대 문화, 특히 미국 문화가 “외향성 이상”에 의해 어떻게 지배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안에는 카리스마와 자신감, 그리고 표현력이 조용한 사려 깊음보다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녀는 많은 내향적인 사람이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일종의 ‘가짜 외향성’을 연기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지치고, 고립감을 느끼며, 때로는 번아웃 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비록 그녀는 “담대하게 사랑하라”와 같은 문구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니지만, 외향성을 중심으로 한 가치가 ‘조용히 듣고, 깊이 묵상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때때로 소외감이나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조심스럽게 짚어줍니다.
저는 이 비전 선언문을 만든, 제가 사랑하는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이 저와 같은 내향적인 사람들을 소외시킬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분들의 마음과 비전을 진심으로 신뢰합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우리의 사명, 즉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하나님이 저를 창조하지 않으신 모습이 되라고 요구받는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종종 저는 갈멜산에서의 승리 후, 조용히 호렙산으로 물러났던 엘리야 선지자와 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저는 설교자들이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도망치는 겁쟁이 같은 행동으로 호렙산으로 물러난 것을 묘사하는 것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엘리야를 겁쟁이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탈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영혼이 소진되고 비워진 선지자가 언약의 장소로 돌아가, 또 다른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거룩한 침묵으로 들어간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이 저에게는 마치 주일 오후와도 같습니다.
사역자로서 모든 외향적인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후, 저는 고요함 속으로 물러납니다. 회오리바람도, 불도 아닌, 속삭이듯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속삭임을 기다리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내향적이고, 직업적으로는 외향적인 목사로서, 진심을 담아 묻고 싶습니다. 제가 이 비전 선언문을 조금 다르게 읽어도 괜찮을까요?
‘담대하게’ 대신 ‘진실하게’ 사랑하고,
기쁨이 멀게 느껴질 때도 ‘겸손하게’ 섬기며,
용기를 느끼지 못할 때도 ‘신실하게’ 이끌어가도 괜찮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저의 모습 그대로, 그렇게 살아도 될까요?
그렇게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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