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슬러(The Wrestler)와 야곱의 춤

(편집자 주: 이 기고문은 연합감리교뉴스의 파일럿 시리즈인 <영화와 설교> 시리즈의 세 번째이다.) 

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

인생에서 겪는 위기를 주제로 한 2008년 개봉작 “레슬러(The Wrestler)”라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야곱(창 32:22-31)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프로 레슬러인 랜디 램 로빈슨은 현란한 테크닉과 무대 매너로 1980년대를 주름잡던 스타 레슬러였습니다. 하지만 20년의 세월이 지난 후, 화려했던 그의 전성기가 있었는지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는 소수의 관중 앞에서 상대 선수와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피를 흘리며 경기를 하는 대가로 궁색하게 살아가는 퇴락한 레슬러일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프로모터(promoter)로부터 라이벌이었던 아야톨라와의 경기 20주년 기념 리턴매치를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아픈 몸을 약물로 버티면서 금발 염색과 태닝을 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꿈을 꾸던 랜디는 리턴매치를 몇 주 앞두고, 늘 하던대로 생계를 위한 경기를 치른 후 급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심장 수술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재기를 꿈꾸던 랜디는 이젠 레슬링을 다시 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합니다.

야곱은 남다른 야심과 경쟁심 그리고 탁월한 책략과 능력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리브가를 얻기 위해 14년을 기다릴 만큼 인내심도 대단했던 사람입니다.

20년간 지내던 외삼촌의 집을 떠나 고향길에 오른 야곱은 자신에게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서가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엎친 데 덥친격으로,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이끌고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마저 들려옵니다. 20년 동안 객지에서 피땀 흘려 일궈낸 그 모든 재산과 자신의 목숨마저 잃을지도 모르는 위치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올 때, 영어 단어 crisis의 희랍어 어원인 krino의 뜻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위기의 원인을 “판단”하고, 잘못된 것과 “단절”한 후 “결단”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약하고, 그 위기를 “전환점” 삼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기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쉬운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해답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클럽의 댄서 캐시디와 소원했던 딸의 사랑을 얻으려 애쓰던 랜디는 마침내 캐시디와 바에서 함께 춤을 추고, 자신의 딸에게 선물할 옷을 고르기 위해 옷가게에도 같이 가는 사이가 됩니다. 그리고 주말에 샐러드 바에서 일하는 자리를 얻은 랜디는 관중들의 환호성을 환청으로 듣기도 하지만, 점차 새로운 일자리에 적응해가고, 포로모터에게 전화를 걸어 아야톨라와의 20주년 리턴매치 대신 은퇴를 하겠다고 통보합니다.

다행히 딸도 랜디에게 마음을 엽니다. 랜디는 어릴 적 함께 갔던 놀이동산에 딸과 함께 가게 되고, 거기서 딸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캐시디에게 했던 프러포즈가 거절당하자 홧김에 파티에 참석했다가 딸과의 주말저녁 약속을 못지키게 되고, 이에 상처받은 딸은 허겁지겁 자신을 찾아온 랜디에게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부녀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맙니다. 딸의 집을 나서는 랜디의 얼굴이 슬픈 눈물과 함께 일그러지고, 캐시디와 딸에 대한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던 그의 노력도 그렇게 실패하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복수로부터 자신의 목숨과 가족 그리고 재산을 구하기 위해, “남의 발뒤꿈치를 붙잡는다”는 이름의 뜻에 걸맞게, 이번에도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묘책을 생각해냅니다. 

그것은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형 에서에게 여럿으로 나누어진 선물을 보내고, 밤에는 자신의 식구들과 모든 재산을 둘로 나누어 일부를 앞서 보냈던 야곱의 속셈은 어쩌면 어느 한 부분을 잃으면 나머지라고 구하고, 만일 전부를 잃게 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목숨만은 건지려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14년을 기다리며 리브가를 쟁취했던 그 뜨거웠던 사랑도 이렇게 막다른 위기의 순간에 맞닥뜨리자, 그의 이기적인 계산 앞에 빛을 잃고 맙니다.

그렇게 얍복강가에 홀로 남아 있는 야곱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와락 달려들면서, 그의 묘책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위기를 극복하려는 최후의 노력마저 허사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자신과의 근원적인 싸움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고 세우기 위한 싸움 말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인 채, 샐러드 바에서 일을 하던 랜디는 80년대 유명 레슬러였던 그를 알아본 고객의 집요한 확인 질문에 세차게 부정하다 급기야 고기를 가는 기계를 손으로 내려치고, 피투성이가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랜디는 레슬러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되뇌며, 프로모터에게 전화를 걸어 돈과는 상관없이 레슬링을 하길 원한다고 말하고, 포기했던 20주년 리턴매치를 약속합니다. 사랑을 통해 다시 세우려 했으나 실패하며 부정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결정적인 위기를 맞아 자신과의 근원적인 싸움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처절하고 고통스럽지만, 원점으로 되돌아가 정체성을 다시 세울 기회입니다. 20년 전에 건넜던 그 얍복강에 원점으로 되돌아가 홀로 남은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그 배경을 저는 이렇게 읽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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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아,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한단다. 내가 너를 선택했단다. 홀로 도망치다가 벧엘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에 지쳐 잠들었던 너에게 바로 내가 원대한 임마누엘의 꿈을 주었고 언제나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보호해 왔단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너를 불러낸 것도 나란다.

하지만 야곱아, 너는 결코 나를 대면하지 않더구나. 너는 네가 필요할 때만 내 이름을 형식적으로 언급하며, 오직 너 자신과 네 머리와 네 힘과 네 꾀만을 의지했지. 물론 너는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할 수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살아온 인생의 결과가 무엇이었니? 너 자신의 한계에 빠져 여전히 비참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니니?

야곱아, 그런 모습으로, 그런 왜곡된 정체성과 운명을 가지고서는, 결코 내가 약속한 땅에 들어갈 수 없단다. 바로 내가 네 앞길을 막을 것이다.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하나님을 야곱은 사력을 다해 붙들고 늘어졌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몸의 중심에 있어 야곱의 능력을 상징하던 그 부분, 야곱이 의지했을 그 부분을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의지하던 환도뼈가 어긋나 다리를 절게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축복하셨습니다. 야곱의 인생에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입니다.

영화 더 레슬러(The Wrestler)의 스틸컷 갈무리. 사진 제공, 씨네 21.
영화 더 레슬러(The Wrestler)의 스틸컷 갈무리. 사진 제공, 씨네 21.

시합 당일 아침, 경기장까지 찾아와 랜디의 심장 상태를 걱정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캐시디를 뒤로한 채, 랜디는 자신이 속한 곳이 경기장이라고 말하며 결연히 경기장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랜디는 사각의 링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연설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생을 힘들게 살고 있거나, 무모하게 함부로 살고 있다면,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인생에서는 당신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또는 당신들을 사랑하는 그 어떤 것을 잃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내가 끝났으며, 실패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내일을 끝내야 할 때를 알려줄 사람들은 오직 여러분들뿐이며, 여러분이야말로 내 가족이다. 여러분을 사랑한다.”

경기가 시작되자 슬프게 링을 지켜보던 캐시디는 떠나고, 경기 도중 통증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올려다보지만 그녀의 모습은 찾을 수 없던 랜디는 경기 마지막에 링 코너 위로 올라가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으로 링에서 점프하듯 뛰어내리며 이 영화는 끝이 납니다.

랜디는 아마도 심장이 멎는 순간이 올 때 까지 그렇게 가슴의 통증을 부여잡고, 자신의 정체성을 감당하며 살아가겠지요. 

저는 밤을 새운 치열한 싸움 끝에 지치고 다친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을 절뚝거리며 지날 때, 떠오른 태양 아래에서 춤추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댄서 미첼 플라트니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는 동작을 자신이 해낼 때 자신의 성공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어려운 기술과 세련된 우아함으로 관중들의 갈채와 점수를 받는 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과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댄스 비평가 존 마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춤은 어떤 시스템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이다.” 그렇습니다. 제가 말하는 춤은 바로 인생에 대한 내면적인 관점을 드러내어 우리의 마음을 터치하는 그런 춤입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브루스 스프링틴이 부르는 주제가가 나옵니다. 그 노래에서 랜디는 “한가지 재주밖에 없지만 행복에 겨워 들판을 자유롭게 뛰노는 조랑말”, “자신만의 방식으로 길거리를 누비는 외다리 개”, “오직 먼지와 잡초로 속이 채워졌을 뿐인 허수아비”, “허공에 헛주먹을 날릴 뿐인 외팔이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한 후, 그는 “자신의 길을 가며, 자유로이 춤추는 외다리 남자”이며, 내면의 관점이 변화되어 “위로가 되는 것들을 거부하고”, “집처럼 편한 곳에 머물지 않고”, “오직 부러진 뼈와 멍 자국만 보여줄”지언정 자신의 길을 춤추며 의연히 가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야곱의 절뚝거리는 모습은 그의 비참한 패배를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의 내면은 온전한 승리로 가득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그의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환희로 가득 찬 채 절뚝거리는 야곱의 걸음걸이는 인생의 새로운 지평에서 추는 춤이자, 자기기만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춤이며, 새로운 정체성과 운명으로 빚어내는 춤일 것입니다. 더는 절망과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이 없는 구원과 평화의 춤이자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동시에 자아와 대면하며 추는 그런 춤 말입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시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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