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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셨을 때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people living in Jerusalem, resident aliens)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 다 각각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다.”
이 사건은 흔히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에서 혼잡해진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했던 인류에게 소통이 가능하게 한 사건, 즉 창세기 11장의 역전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바빌론 유수의 역전이기도 하다.
그동안 유대인은 순수 혈통을 고집하면서, 이방인은 물론, 혼혈인이 사는 사마리아까지 부정하게 여기고 타민족과 교류와 소통은커녕 식사도 같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의사소통이 된 것이다. 의사소통만 된 것이 아니라 물건도 나누고 교류하였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이런 일의 결과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이 공동체에 참여한 증거는 사도행전 6장에 나온다.
그때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갈등은 평신도 지도자를 세워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하였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 공동체가 혈통 중심이 아니라 믿음 중심의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이는 혈통주의를 고집하던 유대 공동체가 이제는 믿음 중심의 공동체로 변화해 모든 민족에게 열렸음을 뜻한다. 성령님은 의사소통, 물자 교류에 이어 인종 간의 협력과 상생을 주도하신 것이다.
이러한 성령님의 뜻은 정통 유대인이자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환상에서 잘 드러난다.
사도행전 10장 11-14절에 보면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제 육 시에 올라갔는데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본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이것은 신명기 학파의 제사장 그룹에 속한 사람이 하는 대답이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였다. 이것은 신명기 학파의 제사장 그룹이 생각하는 정결 예법과 예배와 관련된 성결 규정을 넘어설 것을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이런 일이 세 번 있고 난 후, 그 그릇은 곧 하늘로 올려져 갔다. 베드로는 이 환상의 의미를 이방인 고넬료가 자기를 초청할 때까지 몰랐다가 고넬료의 온 식구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그 의미를 확실히 깨닫게 된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한 베드로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말은 인종과 성별, 신분과 정체성 등을 따지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베드로가 이들에게 복음,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에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선포하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면서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즉 성령세례를 받고 이어서 물세례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인정하신 것을 제자들이 인정하는 의식을 행한 것이다.
우리가 동성애자를 안수하거나 그들의 결합을 인정할 때도 먼저 하나님이 인정하셨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제 이방 선교를 향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유대인 혈통주의와 할례를 고집하는 이들은 여전히 이방 선교에 제동을 걸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면서 신명기 학파 제사장 그룹 중 혈통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때 바울 및 바나바는 신명기 학파 예언자 그룹 중 믿음을 중시하는 입장을 대변하면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사도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바리새파 중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주장하자,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발언하였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이는 사도행전 10장에 나온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의 자기 경험에서 나온 강력한 간증이었다.
이방 선교에서 본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사도 회의에서 보고한 바나바와 바울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은 후, 야고보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만장일치 결정을 내린 후 이렇게 편지를 썼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성령님께서는 이제 사도 회의를 통해 교회의 일치를 이루시고 교회가 나아갈 길을 지시하신 것이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단순한 행동 지침 외에 다른 유대인들이 중하게 여기는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 예법 규정은 다 면제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정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지켜야 할 규정이 같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신명기 학파의 예언자적 그룹 중에 사회 정의를 중시하고 믿음을 중시하는 그룹에 가까운 선언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은 한 가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공유물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인간의 고통과 세상의 악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도대체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런 고통과 악을 허용하시는가 하는 다양한 입장을 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를 포용하는 교회든 동성애자를 포용하지 않는 교회든 서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는 점을 감사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갈라서더라도 서로 비방하고 욕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성경은 두 교회가 다 인용할 수 있는 구절과 신학을 제공해 준다. 마치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비를 내리시고, 햇볕을 누리게 하시고,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시듯이 성경은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에게 신학적 토양과 해석학적 공기를 허용한다. 다만 내 입장이 성경의 어떤 전통을 따르는 것인지를 알고 있기를 바란다.
전통 물리학자와 양자물리학자가 자신의 학문이 응용되는 분야를 알아내듯이, 유클리드 기하학자와 비유클리드 기하학자가 어떤 경우에 어떤 기하학이 필요한지 알아내듯이, 전통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누가 어떤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는지를 분별해서 섬길 사람을 섬기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와 같다면 누가 저들을 섬길까? 나와 다른 사람이 있어서 감사하다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 대하기를 기도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틀의 변화(Paradigm Shift)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누려고 한다. (5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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