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이시는 하나님

(편집자 주: 글은 지난 5월 5연합감리교뉴스에 게재된 전상의 목사의 <분열을 넘어 '우주감리교회'로, 원로 목회자의 신학적 비전>읽고 필자가 보내온 기고문이다. 글은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연합감리교뉴스의 편집 방향이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않음을 미리 밝힌다. 연합감리교뉴스는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기다린다.)

조선형 목사, 사진, 필자 제공.조선형 목사, 사진, 필자 제공.

소설가 김애란 작가는 얼마 전 한 인터뷰 토크쇼에서 AI(인공지능)와 인간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망설임'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망설임이야말로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김 작가는 “누군가의 고민·아픔을 들을 때 어떤 말을 삼키거나 주저하거나 짐작하고 헤아리는 찰나가 있더라.”라며 “유려하고 빠른 AI의 조언보다 인간의 투박한 침묵이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최근에는 망설임 없는 AI가 전쟁 수행에 활용되면서 AI에 살상 권한을 부여하는 문제와 그 실행 과정에 내재한 위험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만일 '망설임'이 인간다움의 특징이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으니 그 망설임의 기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 구원과 회복의 과정에는 수많은 망설임이 녹아 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대로 즉각 심판하지 않으셨다. 노아의 시대에는 방주에 오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방주 문 닫는 타이밍을 고민하며 기다리셨을 것이고, 소위 '성전'이라 불리는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 중에도 하나님은 매번 망설이셨을 터이며, 간음죄로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향해 돌을 든 사람들을 보면서도 성육하신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한참을 머무르셨다.

그 망설임은 '불확실함(Uncertainty)'이나 '부정확함(Incorrectness)'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크고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서 나오는 '하나님다움(Godlikeness)'의 표지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셨다.

얼마 전, 조용히 예배당에 앉아 있다가 연합감리교뉴스를 통해 한 편의 글을 읽게 되었다.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은퇴·원로 목사님이신 전상의 목사님께서 기고하신 '우주감리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전을 다룬 글이었다. 긴 호흡과 먼 시선으로 감리교회(UMC/GMC)의 분열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나님의 마음이 꼭 그러하실 것 같았다. 내게 어떤 대표성이 있는 것은 아니나, 현직에서 목회하는 후배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마음에도 그간 공감과 감동이 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글로 옮겨 보고자 한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무엇을 놓쳤고,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을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던 중 내 마음에 '피상성'이라는 단어가 화두로 떠올랐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심오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각 없는 일상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사용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에서 'Banality'는 '피상성(Shallowness)'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피상성’의 문자적 의미는 껍데기와 겉모양만 본다는 뜻이다. 즉 "깊이 살피지 못하고 표면에 머물면서 본질에 닿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누군가 가장 위험한 일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피상적인 앎에 높은 시선과 차가운 마음이 섞이면 어둠의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그 결과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하고, 타인을 극단적으로 규정하며, 서로를 악마화하는 편견의 세계 속으로 쉽게 미끄러져 들어가기 쉽다.

유대교 신학자이자 랍비 아브라함 헤셸(Abraham J. Heschel)은 "참된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혜를 비범한 상식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지혜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말씀, 세상,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한 사람은 자신만이 '비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래서 ‘진리’나 ‘옳음’, ‘거룩함’에 대한 기준과 판단력을 자신이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이라고 말씀한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모든 것을 단정하고 확신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함부로 판단하거나 쉽게 결론 내리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망설임’이며,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겸손한 시선’이자 하나님과 말씀, 사람과 고통의 자리로 기꺼이 내려가 함께 머무는 성육신적 자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단순히 율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시선으로 사람과 사안을 바라보는 ‘여호와의 지혜’를 외면하는 태도에 대한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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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의 참된 적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인 마귀이다.

마귀가 가장 정성 들여 하는 일은 사람들의 시선이 '공중(Air)'에만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진리와 사람, 그리고 사안의 본질을 보지 못하며, 모든 것을 그저 피상적으로만 바라보게 한다. 이는 각 사람이 살아가는 형편과 선한 열심, 연약하지만 진실하게 애쓰는 마음은 외면한 채, 신학적∙문화적∙경험적∙정서적 차이만을 확대해 보게 만들어, 결국 교회의 하나 됨은 약해지고, 분열과 반목으로 기울어 간다 .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말하자면 게으른 피의자인 동시에 희생자다. 물론 어느 진영에나 그 피상성의 작동 원리를 종교적·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영향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관심이 없고 성전 뜰에서 진영 장사를 하고, 돌아오는 혜택을 돈으로 바꾸는 일에만 혈안이 된 자들이며,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을 걸고 감히 ‘광을 파는’ 도박을 하는 자들이다. 누가 그러한 자들인지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몸을 더럽히고 허문 대가로 예수님은 언젠가 그들이 앉은 의자와 테이블을 둘러엎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헤셸은 "우상이란, '나의' 하나님이면서 '너'의 하나님은 아닌 신. 나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시지만 너에게는 관심이 없는 신. 그것이 우상이다."라고 했다.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님, 같은 성령님을 고백하면서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그러니 지옥에나 가라."라는 식이라면, 어찌 그것이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온 우주 만물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태도이자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설령 상대가 무언가를 잘못 이해하거나 판단하고 있는 '소자(마 18:6)'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고 산 형제가 실족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설득하는 동안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아직도 교단 탈퇴 과정과 그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과 난처함을 호소하는 목회자와 평신도, 그리고 교회가 적지 않다. 우리 교회 역시 큰 아픔을 겪었고, 지금도 회복중에 있다. 한편으로는 그 모든 형편과 고통의 깊이를 다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피상적이고 섣부른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그럼에도 예배당에 앉아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을 구할수록, 적어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만큼은 더 또렷해지고 분명해지는 것 같다.

안타깝다. 이대로 마귀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요즘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산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며 목회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결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의식하며, 내 손에 든 돌을 먼저 거두는 일, 내 진영의 승리를 향한 욕망을 내려놓는 일, 내 옳음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리를 내어드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우리' 차원에서 눈에 띄도록 작동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살아 계신 ‘우주적’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습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깊어진다.

강단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책을 쓰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던 헨리 나우웬은 어느 날 그 모든 자리를 내려놓고 캐나다의 작은 장애인 공동체 라르쉬(L'Arche)로 들어갔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 평생이 걸렸다."

어떻게든 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만이 이기시도록, '나'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할 지혜와 용기를 구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조심스럽게 망설이고 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인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또는 전화  615-742-5484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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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연합감리교 총회재무행정협의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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