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 사 1:2~3
유다 왕 웃시야로부터 히스기야 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던 선지자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시대의 모습은 한 마디로 ‘주인을 모르는 세대’였다. 선지자는 소와 나귀의 예를 들면서 주인을 더 잘 알아보는 것은 인간이 아닌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보았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주인의 구유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경고한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자식을 양육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히려 그 가슴에 날선 비수를 찌른 반역 행위요, 패륜적인 사건이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경험하는 일이지만 자녀의 말 한 마디, 혹은 행동 하나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날아올 때가 있다. 남도 아닌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무방비로 당하게 되는 공격에 속수무책 당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의 부모 혹은 어떤 이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실은 날마다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아간다.
신앙이란 ‘제 주인을 찾아가기’이다. 나와 너, 우리의 주인을 바르게 찾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그 주인의 자기 계시, 즉 하나님 자신 스스로를 밝히 알려주는 도구다. 인생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살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인이 아끼는 물건, 혹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인은 그 물건 내지는 사람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하물며 주인이 배 아파 낳은 자녀라고 한다면 그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선지자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자녀를 양육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며 사랑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금수만도 못한 행동으로 하나님을 무시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예 믿지 않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진짜 불신앙은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를 일컫는다.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는 이들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았던 이들의 첨예한 대립으로 점철되어왔다.
지금 이 시대도 그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예수를 향한 세 가지 유명한 시험에서 보듯이 세상의 임금은 부귀영화를 비롯하여 자신이 기꺼이 줄 수 있다고 하는 모든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여기에는 막연한 두려움과 소외감도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하루에도 끊임없이 세상은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노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마치 출애굽을 하여 광야로 나갔던 자유민들이 옛 습관을 따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끔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지혜로운 것이며, 현실적으로 사는 것이라 부추기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일정 수준에 맞지 않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이들을 언급한다. 그런데 짐승의 입장에서 보면 서운하기 짝이 없는 말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짐승이 사람보다 더 나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진돗개의 경우, 한 번 주인으로 모신 사람을 거의 배신하지 않는 충견으로 알려져 있다.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진돗개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가뭄에 물을 만난 것 같은 희소식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말 못하는 짐승이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을 다하는 진심(眞心)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다. 한 번 주인이면 영원한 주인이 되는 진돗개의 그 마음으로 주인되신 하나님을 모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