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끝까지 노력합니다: 카일 리튼하우스 무죄에 대한 정희수 감독의 성찰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8장 1-8절)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 된 이들과 복음에 대한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지금쯤 여러분은 17세 소년인 카일 리튼하우스가 통행 금지 명령이 내려졌던 그날 밤, 이를 어기고 콜트AR-15반자동 소총을 시위 현장에 가져간 것과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카일 리튼하우스는 11월 19일 무죄 평결로 석방되었다.)
그 시위 현장에서 리튼하우스는 3명의 남성에게 총격을 가했고, 그중 2명이 숨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폭력을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날 밤에 있었던 시위는 경찰이 제이콥 블레이크에게 가했던 총격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였습니다. 블레이크는 경찰로부터 등에 여러 차례 총격을 받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심한 중상을 입었습니다.
많은 분이 어제(11월 19일)의 판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도 기도하고 있으며, 혼란스러운 가운데 성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정의를 향해야 하는 우리의 실천의 일환으로 그에 관한 목회적 관점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리튼하우스는 배심원들로부터 무죄를 선고받았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것을 그가 장전된 AR-15 소총을 시위 현장에 가져와 인명 살상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을 조장한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2016년 총희 결의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셨으며(마태 5:9), "우리는 연합감리교인들이 각자의 지역 상황에서 총기 폭력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룰 것을 요청한다.”(3428)라고 결의했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번 비극은 총기 폭력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시스템은 공평과 평화(shalom)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 반영된 공동선(共同善)을 실현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스템은 불평등한 보건, 교육, 경제 그리고 불공정한 정의를 낳았으며, 그로 인한 항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번 대심원 평결은 불공평한 정의의 폐해를 악화시키는 자기들끼리의 정의(vigilante justice)일 공산이 높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지역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깨어진 정의를 보호하는 침묵의 문화를 무너뜨리는 발언을 한 여인을 중심에 두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대변자를 갖지 못한 그녀의 목소리를 중심에 놓으셨지만, 그 비유의 방관자였던 사람들과 우리 중 대부분은 어쩌면 불의의 첫 번째 희생자에게 하나님의 새로움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의와 자비로 우리 삶의 순간에 개입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은 재판장을 부끄럽게 만든 것은 정의를 요구하던 과부의 끈질긴 외침이었습니다.
과부의 호소와 행동은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의 평화(shalom)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부인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깨워줍니다.
인내는 정의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의의 정당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과부는 포기하며 자신의 도덕적 나침반을 넘겨주지 않았고, 그녀의 호소와 행동은 실패한 우리의 시스템이 하나님의 섭리를 말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와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평화(shalom)를 위해 세상을 괴롭힐 뿐 아니라, 세상의 불평등을 난처하게 만드는 우리만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자신의 공평한 시스템을 만들어 주님께서 오실 때에 우리 가운데 있는 믿음을 보실 수 있도록 가정 내에서도 끈기 있게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새로움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담대히 소망하고, 강하게 주장하며, 행동하십시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미가 4:3)”,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이사야 11:9)”라고 소망했던 선지자들의 희망찬 상상력으로 시스템을 만드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소망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제자 삼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저는 케노샤 시민들을 위한 정의를 향상 시키는 시스템과 우리 자신의 인종적 정의 그리고 급진적 포용력의 진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신실함과 끈기 있는 노력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주 안에서 소망을 품고,
정희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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