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5월 20일 <바라부행동연대(The Baraboo Acts Coalition)>가 주최한 “반아시안 인종차별 및 외국인 혐오(Uncovering Anti-Asian Racism and Xenophobia)”를 주제로 한 바라부 토론회에 강사로 초청된 정희수 감독의 주재 발표 내용이다.)

오늘 저녁, 저를 <반아시안 인종차별 및 외국인 혐오(Uncovering Anti-Asian Racism and Xenophobia)>를 주제로 한 바라부 토론회의 주 강사로 초대해 주신 <바라부행동연대(The Baraboo Acts Coalition)>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제 개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 주제로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바라기는 이 시간이 단지 반아시안 인종차별 및 외국인 혐오에 관한 쟁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사려 깊게 돌보며 환영하는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 지침도 찾아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애석하게도 미국의 역사 속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과 인종 차별처럼, 미국 내 반아시안 인종 차별의 오랜 역사는 건국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19세기에 중국인 노동자들은 광산과 벌목 캠프 및 대륙횡단 철도건설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들의 거주지는 열악한 의식주와 위생 상태 및 형편없고 불결한 환경은 감염병을 확산시킬 만큼 끔찍한 수준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부상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질병의 만연으로 인해 여성과 어린이들의 사망률도 매우 높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20세기에 발발한 전쟁은 반아시안 인종차별과 박해의 주요 요인이 되었습니다. 진주만 공격 이후 1942년부터 1945년까지 120,000명 이상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옮겨졌고, 극도로 열악한 환경의 수용소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일본계 미국인 대부분은 자신의 자산과 소유를 잃었습니다.
제가 섬기는 연합감리교회 위스콘신 연회에서는 매년, 인종 정의와 화해를 위해 헌신하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에게 페리 사이토(Perry Saito) 목사의 이름을 딴 시상식을 갖습니다. 페리 사이토는 비폭력과 생명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사이토의 기독교 신앙과 평화와 정의에 대한 헌신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캘리포니아에 있는 일본인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화해친목회(Fellowship of Reconciliation)의 설립을 돕고, 평화와 빈곤 및 인권과 관련된 정의와 화해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인종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동시에 위스콘신주의 여러 교회를 섬겼습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아시아인 전체를 향한 폭력은 1942년부터 1950년 초까지 증가하였고,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우는 사형(lynch)을 가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비록 미국이 한국과 남베트남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공격과 폭력은 한국전과 베트남전이 진행되던 시기를 비롯해 그 이후에도 계속 증가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한 공격과 폭력의 대부분은 세계화와 사스(SARS), 조류독감, 코로나19 등의 질병과 바이러스의 확산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반아시안 인종 차별주의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 하나는 아시아인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무지와 무분별지한 이해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구 문화는고대 중동에서 부르던 오리엔탈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채택한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동쪽에서 뜨는 태양에 의존하여 나침반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오리엔탈은 그들의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황화(黃禍)"와 같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고정관념은 대부분의 동양 민족과 문화를 하나의 불분명한 덩어리로 묶어 버렸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다양한 흑인 민족과 문화, 히스패닉 라틴 민족과 문화 및 미국 토착 원주민들과 문화를 향해 복합적으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모든 광범위한 인종과 문화, 언어와 민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한 인종이나 민족 또는 문화를 다른 인종이나 민족 또는 문화보다 더 억압받거나 더 많이 희생 시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인종차별은 근절되어야 하며, 온전히 정의롭고 포용적인 사랑의 공동체와 인종적 수용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도전은 무지입니다. 우리가 무지 가운데 살아가는 한,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동기부여가 생길 리 만무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배울 때, 다른 사람의 관습과 신념에 대해 이해할 때, 다른 사람을 구체적인 사람이나 가치 있는 개인으로 알아가려고 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동정과 공감, 배려를 키워나갈 수 있으며,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경계도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외국인을 향한 혐오는 단지 우리와 다르거나 이국적이거나 혹은 낯선 타인들에 대한 두려움일 뿐입니다.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관계를 맺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힌두교 경전인 베다에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에 대한 우화가 나옵니다. 그는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같은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공격하려는 독사에 겁이 잔뜩 났지만,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뱀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뱀이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말려 있는 밧줄에 불과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지의 것들을 향한 우려를 제거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한 계몽의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관한 참된 지식은 세상을 덜 두렵고, 더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누군가를 위협이 아닌 잠재적 축복의 원천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여유롭고, 안전하며, 평안함을 느낄 수 있게 되고, 다양한 자극들을 여유로우면서도 신중히 고려하며, 관대하게 생각함으로써 긍극적으로는 명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함께하는 것이 진정한 이해를 함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은 의도적인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며, 관계를 맺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라는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울타리가 존재하는 곳에는, “우리” 울타리 안에 속하지 못한 "그들"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속한 “우리”라는 울타리를 “그들”이 “우리”가 되어 모두가 우리가 될 때까지 함께 지속해서 넓혀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가장 흔하게 듣는 욕설입니다. 아시아인의 언어가 서양인의 귀에 거슬릴 수 있습니다. 또한 여러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넘나드는 엄청난 종류의 산해진미를 가진 아시아 음식들의 독특한 색감과 향신료도 서양인에게는 생소할 수 있습니다. K-Pop과 중국의 록 음악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긴 하지만, 다양한 형식의 아시안 음악은 서구적 형식과 전통적으로 상당히 다릅니다. 대부분의 아시안 문화의 관행과 선호는 백인들, 서구적 기준에 대한 당면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표준 또는 기준은 단순히 한 문화의 관행과 선호 그리고 세계관이지만, 기준이라는 것의 현실을 들여다 보면 지배적 문화가 우선권을 가지고 기준이 되고, 지배자적인 관점으로 소수 문화를 기준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지배 세력의 기준을 벗어난 관행과 선호, 세계관은 종종 폄하되거나 인종차별적이고 모욕적으로 분류됩니다. 미국의 역사에서 다양한 아시안 그룹들은 "짱깨들(Chinks)", “지저분한 것들(Gooks)”, “째진 눈(Slant-eyes)”, “황견(Yellow dogs)”, “악마(devils)”, “악령(demons)”, “원숭이(monkeys)”와 같이 무례하고 상처를 주는 호칭으로 불려왔습니다.
최근 우리는 아시아인과 태평양 제도의 원주민계로 보이는 사람에 대한 무분별한 인종차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 심지어는 하와이인에 대한 증오 범죄와 공격적인 행위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퓨 리서치(Pew Research)는 1980년대 미국 시민 4명 중 3명이 다양한 아시안 민족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왜 일본인, 필리핀인, 태국인, 라오스인,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캄보디아인, 미얀마인들이 인종적으로 무감각하고 부정확한 용어인 '중국 바이러스'와 '쿵플루'와 같은 언사로 의해 촉발된 폭력에 시달리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를 모든 아시아인을 공격하는 근거와 이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말의 세계화는 중국을 새롭고 엄청나게 전 세계와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세계 무역을 통한 성장과 세계적 조직에 참여하면서 중국은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습니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을 통하여 세계 경제에 중국의 우월성을 나타나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륙 간 국제 여행의 성장과 함께 중국인이 당면한 엄청난 보건 문제는 세계적인 보건 문제가 되었습니다. 중국이 이러한 보건 문제를 일부러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필요한 조치를 전세계 국가들이 함께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 공동체이기 때문에, 한 부분이 위험하면, 사실상 모두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1995년부터 2020년까지 25년 동안 연방수사국 증오범죄조사과(the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Hate Crimes Analysis Division)는 비아시아인의 아시아인에 대한 폭력을 조사했습니다.
다음은 몇 가지 분석 결과입니다.
폭행에 의한 사망– 442명(매년 약 18명)
폭행에 의한 부상– 7,721명 (매년 약 308명)
주택 및 건물 손상 또는 파괴– 손상 11,231건 (매년 약 450건); 파괴 4,414건 (매년 약 177건)
기물파손, 조롱, 폭행, 테러 등 "증오 범죄"의 대상– 56,451명 (연 2,258명, 하루 평균 6명)
연방수사국은 이 수치가 범죄의 약 20%만이 보고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위 숫자들에 각각 5를 곱하면, 그 결과는 정말 소름 끼칠 정도입니다.
저는 위스콘신주에 있는 중요한 아시아 공동체 중 하나인 몽족 형제/자매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몽족 사람들이 미국에서 35년 넘게 살아왔음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모범적 소수인종으로 여기거나, 혹은 '실패'한 기대 이하의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보이든 몽족 미국인들의 다사다난한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에서 마오족 또는 메오족으로 불리고 있는 몽족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출신의 민족입니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과 라오스 내전 중 라오스에 거주하던 몽족은 미군을 돕는 게릴라 전투원으로 모집되어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을 받던 북베트남군과 파테트라오군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몽족은 민족적, 정치적 박해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미군에 협조했기 때문에, 몽족은 라오스를 떠나 난민이 되어 태국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국가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친족 관계와 민족의 공동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사회 문화 자본을 형성하여 경제적 기회를 확장하고, 다양하고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얻기 위해 위스콘신으로 이주했습니다. 몽족계 미국인 공동체의 빈곤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하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위스콘신과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소수민족 집단 중 하나입니다. (아시안은) 모범적인 소수민족이라는 고정관념과 인종차별은 그들을 표적 삼았고, 드러나지 않는 희생자로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한국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오래전 역사로 굳이 돌아가지 않더라도, 한국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여러 강대국에 의해 끊임없는 공격과 침략을 당했습니다. 한국은 정기적으로 괴롭힘을 당했고, 20세기 초,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그들의 힘을 겨루는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결국, 일본이 승리하면서 식민지식 개발이 시작되었지만, 모든 것은 항상 일본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많은 희생을 치렀고, 미국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하기 전, 한반도는 잠시 해방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38선을 따라 남과 북이 분단되었고, 1950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북한이 남한을 침공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3년 후인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지금까지 그렇게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3년 전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 사이의 역사적인 만남이 있었고, 이는 한반도 군축과 통일을 향한 커다란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평가받는 판문점선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 후로 더 이상의 큰 진전은 없었지만, 세계 여러 지도자는 자신의 평생에 남과 북 그리고 미 정상 간의 회담이 성사될 것이라고는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감독으로서 제가 실천하는 영적 훈련 중 하나는 비기독교인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감독인 저는 거의 매일 온종일 잘 훈련된 기독교인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가능한 한 여러 종교와의 대화에 관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슬람교도, 불교도, 힌두교도, 심지어 무신론자인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저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제가 어떻게 감리교인이 되었는지,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되었는지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영적 여정을 함께 하는 진정한 동반자들입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 곳과 일할 곳을 어떻게 선택했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직장을 찾아 떠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그들의 생활 양식과 폭넓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한번은 워싱턴 DC의 파운드리 교회의 초청 강사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저는 그날 오후 거기서 아시아계 전문 직업인들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디에서 살며, 일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은 개방적이고, 다양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은 성소수자 공동체가 인정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매우 다양한 인종과 소수인종이 섞여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든 연령대의 모든 인종이 있어야 하고, 특히 젊은 세대에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오늘날 그런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를 살펴 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장식할지는 결국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것을 반대하는 정도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어떤 것을 지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진실되고 포용적이며 공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될 성경 네 구절을 간략하게 짚어보고자 합니다.
· 로마서 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작금의 행태와 우리 역사의 상당 부분을 통해 지속되어 온 행태가 미래에도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법은 없습니다. 무지와 편협함, 편견과 침범 및 폭력에 대한 순응은 교육과 관여, 관계 건설과 기독교적 핵심가치를 성찰하려는 규칙적인 참여를 통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 미가서 6: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선을 행하며, 사랑과 은혜의 믿음 안에서 계속해서 함께 성장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무엇이 선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항상 어디서든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실천하고, 온유를 사랑하며, 친절과 연민, 자비와 평화를 모든 이에게 확대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정의를 위해 무한한 친절과 겸손으로 함께 일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에베소서 2:13-14–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만일 사람 사이를 나누고 있는 벽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으로 인한 것이고,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을 갈라놓는 모든 적대의 벽을 허무셨고, 인종, 나라, 언어, 피부색 그리고 민족들을 영광스러운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인종차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편견일 뿐만 아니라 반기독교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연합감리교회의 첫 번째 과제는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인종차별을 해체하고, 제거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용할 성서적 이미지와 가르침은 저에게도 매우 핵심적 것입니다.
· 마태복음 5: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저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바울이 로마서 12장 2절에 쓴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이라면, 현대 교회는 평화를 이루고, 평화를 건설하고,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양육하고, 후원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해,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의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평화는 사랑하는 공동체의 근간이고, 그리스도는 우리가 세워야 할 목표의 머릿돌 되십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도(Methodists)”라고 불리던 사람들을 소그룹인 속회를 통해 영적 교육과 신앙의 성장을 지도하기 위해 "총칙"을 확립했습니다.
이 규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해를 가하지 마라.
둘째,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라.
셋째,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 행하라.
웨슬리는 우리가 이 간단한 지침을 모두 지키면, 사랑의 공동체가 우리 삶 속에 가능하다는 비젼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육신 되어 모든 이에게 치유와 격려와 사랑과 용서와 도움을 베풀라고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교회 안에는 인종차별이 발붙일 곳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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