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죽음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한 여름 내내 무성한 잎사귀를 내며 있는 대로 가지를 뻗쳐 간 나무들이 가을이 깊어갈수록 하루가 달리 모습이 변해간다. 가장 빨리 변하는 것은 잎사귀 색깔이다. 하지만 아무리 빨갛고 노랗고 형형색색으로 물들어 그 자태를 한껏 뽐낸다 해도 금방 시들시들하다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가을은 ‘떨어짐’(Fall)의 계절이다. 이 떨어짐에 착안하여 사람들은 ‘인생의 황혼기’를 가을과 견준다. 그렇다면 죽음은 다름 아닌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의 결별이며 또 다른 출발을 위한 종착점인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이 결별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종착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나아가는데 자신은 아직도 출발점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인생의 허무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 그 어리석음에 있다 할 것이다 (전도서 7:4,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있다” - 표준새번역).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아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더욱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사실, 황혼기에 접어든 자들만이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니다. 살아갈 날이 한창인 나이에,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갑자기 죽는 것을 가리켜 ‘요절’(夭折, untimely death)이라 한다. 주변에는 이 시기 상조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문제는 누구도 이 요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사랑하는 것들과의 결별이 먼 장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마치 오늘 내가 종착점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죽을 준비는 살 준비다. 멀쩡한 사람이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산다고 하여 염세적 허무주의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이와 정 반대다. 우리 모두 넓은 의미에서 시한부 인생을 산다면 오늘 하루를 함부로 살 수 없다. 더 열심히, 더 뜨겁게 살아야 한다. 더 웃으며, 더 즐겁게 살아야 한다. 더 아끼며,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미국의 호스피스(hospice)운동의 선구자로 30년간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한 퀴블러-로쓰(1926-2004)가 그의 명저, ‘인생수업’(Life Lessons)에서 한 말이다. “죽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삶이 우리에게 사랑하고, 일하고, 놀이를 하고, 별들을 바라볼 기회를 주었으니까. 살고(Live), 사랑하고(Love), 웃으라(Laugh), 그리고 배우라(Learn).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우리는 내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이 순간을 힘써 살아야 한다. 이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의 진면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