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바를 모르는 믿음으로

(편집자 주: 본 기사는 한인목회강화협의회가 2022년 6월 27-28일 이틀간 줌으로 주최한 <미래를 향한 거룩한 대화(Holy Conferencing on What’s Next?)>에서 조선형 목사가 발표한 내용이다.)

사진 제공, 조선형 목사.사진 제공, 조선형 목사. 

감리교에는 4가지 표준이 있습니다. 

웨슬리가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성공회의 3가지 표준인 성서와 전통 그리고 이성에 ‘경험’을 추가한 것입니다. 웨슬리의 이 신념을 연합감리교회의 헌법과 법을 모은 장정(Book of Discipline)은 이렇게 약술하고 있습니다.

“웨슬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성서 안에 게시되었고, 전통에 의해 조명되었으며, 개인적 경험에서 생기를 얻고, 이성에 의해 확고해졌다.”                        

10여 년 전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한 인터뷰에서, 저는 연합감리교 목사로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열린 자세(Openness)라고 답했습니다.

모두 아시는 것처럼, 이 열린 자세는 줏대 없이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태도를 말함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이나 신념 없이 모든 것에 열려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부족한 내가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인도함을 받아왔다는 확신과 함께 아직 그 종점에 이르지 못하고, 여전히 완성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는 정직함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이 진행 중인 믿음의 여정, 그 제자 됨의 여정에서 주님이 누구를 통하고, 어떤 일을 통해서, 무엇을 더 가르치시고, 어떤 부분을 더 고치시어 우리를 완전함에 가깝도록 성숙하게 하실지를 겸손히 듣고 배우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각을 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제한을 두지 않은 열린 상태에서 경청하고, 성령 안에서 숙고해 가는 일입니다.

사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진리는 완전하나 우리는 그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담을 만큼 완전하지 않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이성을 초월하여 일하시며, 성경은 그것을 계속해서 증거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곳에, 저보다도 훨씬 더 지혜로우시고, 성경에 해박하시며,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인 깊이가 남다를 뿐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하시고, 더 깊은 체험을 하신 분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저는 오늘까지 저의 마음에 성령께서 비춰주신 생각들과 그것들을 정리한 내용을 토대로 여전히 고민 중인 것들을 솔직하게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이 다른 훌륭하신 강사님들의 커다란 지혜의 줄기 곁에서 작게나마 일조할 수 있는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눔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생각하다, ‘갈 바를 모르는 믿음으로’라고 정했습니다.

교단의 상황과 그로 인한 우리 한인 교회의 성도님들 그리고 목회자들을 생각할 때의 제 심정이 딱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어디가 목적지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어느 길을 택하면 주님이 기뻐하실지를 기도하며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고, 왜 이렇게 답이 안 나올까를 두고 곰곰이 생각해봐도 마음에 걸리는 것 투성이였습니다. 혹여 제가 지혜와 믿음이 부족하거나 결단력이 부족해서 그 길을 못 찾는 것은 아닌가하는 마음에 정직하게 생각해보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대로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주님께서 온전히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옳은지 어디가 주님의 뜻인지를 서둘러 찾으려 하기보다 무슨 마음과 태도로 이 과정을 통과하여 지날 것인가에 마음을 더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더 높은 가능성을 ‘예측하는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어느 길로 가든 그 과정에서 주님을 놓치지 않고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일 것 같았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첫 믿음의 여정을 시작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직 지시하지도 않은 ‘지시할’ 땅으로 목적지도 모른 채, 막연해 보이는 길을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 길을 떠난 것은 ‘목적지에 대한 확신’이 아닌,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이었으며, 그것이야말로 이 혼란스럽고 어려운 길을 가는 동안 다른 건 몰라도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에 얻어지는 평안 그리고 정직하고 진실되게 그 길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을 확보하는 ‘믿음의 길’이라 믿습니다.

또한 혹여라도, 나중에 이르게 되는 길이 여전히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태라 할지라도, 그 길이 여전히 주님을 놓치지 않고 걷는 길이라면, 언제나 그랬듯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이면 충분하리라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해 보니 적지 않은 경우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 길이 옳으니 이 길로 가라’라고 명하시기보다 어느 길로 가든지 ‘내 안에 거하며(요15), 내 옷자락을 놓치지 말고 따라 걸어라’라고 하셨고, 그렇게 주의하며 주님 곁에서 가까이 걷다 보니, 결국에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복된 곳으로 인도함을 받았다고 고백하게 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단과 한인 교회들 그리고 목회자들이 얼른 답을 구하기 힘은 이 과정을 지날 때 적어도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며 함께 지났으면 좋겠다’하는 생각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예수님만 ‘진리’이시고, 나는 ‘번역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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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이신 예수님과 그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 그리고 나라는 번역기를 통해 해석된 확신은 진리에 가까울 수는 있으나 진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변함이 없지만, ‘나’라는 번역기가 한계가 있는 이성을 가지고, 여러 문화와 전통에 영향을 받은 선입관과 미묘하게 결합되어 불완전하니, 번역 과정에서 얼마든지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씀 번역 과정을 도와주고 계시지만, 내 생각과 성령님의 생각이 어느 비율로 얼마만큼의 역할을 하며 이르게 된 해석이고, 확신인지 우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사는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겸손하고 다른 가능성에 열려있어야 할 것입니다.

존 웨슬리가 말한 네 가지 표준인 ‘성서, 이성, 전통, 경험’ 역시 서로를 향해 열려 있어야 건강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초월적인 계시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성서’는 ‘이성’에 의해 해석되고, ‘전통’과 개인적인 ‘경험’은 그 이성이 어느 방향으로 작동할 것인지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서를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객관적인 해석과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할 때도, 간혹 그 이성이 주관적으로 작동하여 같은 사실에 대해 전혀 다른 결과를 맺기도 합니다. 즉, 이 네 가지 표준 중 한 가지가 나머지를 모두 독식하게 되면, 비틀리고 왜곡된 확신에 이를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얼마 전, 저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며, 어떻게 그렇게 진보와 보수가 절반으로 딱 갈라지는지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사람이란 무엇이고, 이성이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우리 교단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형국입니다. 양쪽 진영 모두 이성적 판단과 논리적 사고에 뛰어난 석학들이 있음에도, 같은 이슈를 두고 어떻게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이성이 작동하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 상황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이성이 마냥 순수하고 객관적이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1+1=2’와 같은 수학적 연산은 같은 과정과 결과를 도출하지만, 그 밖의 영역은 각자의 경험이나 전통 또는 문화나 성향 등이 영향을 미치기도 하며, 특히 우리의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욕심이나 숨은 의도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가끔 농담으로 하는 ‘Everyone’s common sense is not common.’이라는 웃픈(편집자 주: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 말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어쩌면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경고겠지요.

가끔 성도님들 중에, “주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라고 너무나 확신에 찬 모습으로 주님이 주셨다는 성경구절까지 격앙된 목소리로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 모습을 보면, 먼저 목회자로서 걱정이 앞섭니다.

그런데 지금, 현 우리 교단의 이슈를 대하는 우리 목회자들과 리더들도 때로는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자꾸 마음에 걸리고, 주님 앞에서 떳떳하지 않을뿐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오로지 부분적인 진리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가르침’이란 ‘성경적 가치’와 ‘성경적 표현 방식’ 모두를 포함합니다.

현 교단의 상황에서, 저의 개인적인 입장을 굳이 표현하라고 한다면, 저는 ‘중도 보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를 보수라고 표현한 이유는 구약과 신약 성경 곳곳에서 보이는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중도’라고 표현한 이유는 성경이 죄로 뒤틀어진 세상에서 동성애에 대한 ‘원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슈를 대할 때, 어떤 태도로, 어떤 목적을 위해 지혜롭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율법적인 원칙만을 너무 앞세우다 보면,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심을 왜곡할 수 있으니, 그 적용 수위와 방법에 있어서, ‘무엇이 중하고 또 그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피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레위기에서는 많은 죄를 나열하면서, 간음한 사람과 동성 간의 성행위를 하는 자는 부정하니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법이고, 성경에 쓰여 있으니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사람들이 끌고 와서 돌로 치려 하자, 그 앞을 막아서십니다. 그리고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 저는 율법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해하기 위한 근거로 주신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함이며, 그 율법을 어느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인지에 대한 적용점을 가르쳐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단의 동성애 이슈는 두 성경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한쪽은, “기독교의 중요한 성경적 가치, 그것도 창조 섭리에 관련된 중요한 가르침은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섬 없이 지켜내야, 교회도 신앙생활도 또 자녀들도 그 가치를 혼동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유지하며 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가치의 핵심과도 같은 일이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한쪽은 “예수님이 그 율법을 적용하신 방법에 있어 생명을 우선시한 부분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칫 정죄하는 율법의 역할이 강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까지 침범하고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는 또한 인간 존재 자체를 차별하는 듯한 표현으로,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의 가치와 정면으로 대치된다.”라고 말하며, 둘 사이의 입장 차이와 갈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밖에도 여러 의견의 스펙트럼은 존재할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의견의 대립을 가져오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둘 중 하나만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강조하고, 진리를 반올림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가르침을 훼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야말로,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지 않고, 둘 중 하나의 가치 안으로 다른 하나를 욱여넣으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성경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경에 어떤 말이 쓰여 있는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어떻게 읽고, 주님의 시선과 마음을 따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일이 모두 예수님을 위한 일은 아닐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교회의 살 길(신학적, 재정적, 심리적)을 마련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뜻 안에서 바르게 거하고 있을 때를 전제로 할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주님의 뜻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교권과 교세를 지키기 위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뜻을 무시하고,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서슴지 않았던 역사 속의 교회는 살려야 될 교회가 아닌, 회개하고 부서져서 변화되었어야 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어려운 교회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기에 앞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교회가 되기 위해, 더 고민하고 기도하며 필요하다면,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길에 서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실 방향으로 나아가면,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자동으로 따라올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통이 있더라도, 종국에는 주님 안에서 교회가 진정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세워지고 개척되는 일, 거기에 피, 땀 흘려 세운 예배당과 건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는 것보다, 외형적 교회를 유지하고 살려 놓는 일에 마음이 더 기울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더욱 마음을 쓰고 지켜내어야 할 일입니다.

 

길은 달라도 성령님은 함께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둘 중의 하나만 ‘진리의 길, 옳은 길,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선입관일 수 있습니다.

일례로,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 여행 직전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2차 전도 여행에 데려가자고 했고,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에서 성실하지 못했던 마가 요한은 자격 미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둘의 견해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둘 모두가 미성숙해서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각자의 부르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행로를 달리했습니다. 물론, 바나바와 바울 모두 나름대로 물러설 수 없는 원칙과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감옥에 갇힌 바울이 그 마가 요한을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두 선교팀의 여정 가운데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고, 모두가 아름답게 쓰임 받았다는 것을 바울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두에게 그 여정에서 성령께서는 강하게 역사하셨고, 모두가 그렇게 아름답게 쓰임 받았다는 것을 바울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한인 공동체 안에도 간단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얽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성애 이슈만이 아니라, 연회와의 신뢰 관계를 비롯해 연회 리더쉽과의 부정적, 긍정적 경험들과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범위를 넘겨버렸다고 느끼는 상황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연회마다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판단하는 정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연회는 안 그런데 왜 저들은 우리처럼 느끼지 않는 거지?” 하는 생각은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습니다.

그 성령 충만한 바울과 바나바도 합의하지 못했던 일을 기억하며, 부득이 길이 나뉘는 결정을 하게 되더라도 얼마든지 그 안에서 서로 축복하며, 함께 귀한 동역자로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덧붙여 저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신앙 양심으로, 동성애 결혼 주례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구원하길 원하시는 사람을 위해, 동성애자냐 아니냐의 이슈를 뛰어넘어 얼마든지 선교적 동역자로 그들을 부르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성령께서는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간다게라는 내시를 만나도록 인도하십니다. 내시는 당시 율법적으로 부정하고 결함이 있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올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성령님이 빌립을 보내, 고국으로 돌아가는 간다게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세례도 주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 그 내시는 고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고, 에티오피아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불과 20년 만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는 나라가 됩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적어도 성령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 교단의 동성애 목회자 안수 이슈와 관련해, 얼마만큼, 어떻게 적용되는 것이 적절할까 하는 것은 더 많은 부분을 고려하고 고민해야 하겠지만,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가 열립니다.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과 유대 선교 공동체가 있었고,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안디옥 교회를 기반으로 한 이방인 선교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회의를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심각한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방인에게 선교할 때, 할례와 구원의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당시 읽던 성서, 이성, 전통, 경험, 그 어떤 범주를 다 대입해 보아도 ‘할례’는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 안에서 회의하며,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사도행전 15:19-20)

사실 이것들 외에도 조건을 덧붙이려면, 얼마나 더 덧붙일 것이 많았을까요?

그러나 몰라서가 아니라,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령께서는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그 제한을 이 정도만 하자로 ‘그 표현 수위 한도’를 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한을 두고, 제한 목록에 넣기 시작하면 한이 없을 것이고, 그 제한 목록에 넣지 않았다고 하여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의미도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정죄가 아닌 사랑과 축복에 이끌리도록 합시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을 동기로 움직이고, 정죄가 아닌 축복의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이 과정의 열매를 성령 안에서 잘 맺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려면, 이 과정을 지나는 동안 우리 각 개인이 사랑을 동기로 움직이고 있는지, 화평하고 인내하며 지나고 있는지, 절제하며 이 길을 가고 있는지 계속해서 물으며 점검해 보면 됩니다.

이 여정의 목적은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는 데 있다기보다, 성령 안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과정의 열매’를 맺으며 잘 통과해 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의 ‘신실한 과정의 열매’를 잘 맺으면, 어느 길을 택했거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고 있다 하더라도’ 평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평안은 눈에 보이는 목적지와 그 경로가 훤히 보일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오고, 그분과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마귀가 쓰는 가장 고도화된 전략은 세상을 이분화 시켜, 서로가 부분적인 명분과 부분적인 진리를 소유한 채, 상대의 약점과 부족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정죄하고 싸우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 하나님, 한 예수님, 한 성령님 안에 있지만, 비본질적인 이슈에 매달리게 만들어, 합력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을 하지 못하는 만들려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념이 갈라지고, 정치도 갈라지며, 남녀노소가 모두 갈라져서, 서로를 더 비난하고 탓하는 것이 강력해지면서,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인 서로를 향한 불평과 원망이 점차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낙태에 대한 이전의 판결을 뒤집은 판결로 인해 미국은 또다시 갈라지고 있습니다. 낙태를 찬성하냐 반대하냐, 동성애를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질문에 왜 이렇게 휘둘려야겠습니까? 적어도, 진지하게 성경을 읽고, 성경의 가치는 물론, 그 말씀을 주신 주님의 마음과 안색을 살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복잡한 문제를 단순히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식의 질문으로 섣불리 접근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간단히 대답 되지 않을뿐더러,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그래요. “뱃속 태아의 생명이 당연히 중요하지요, 또 죽는 것 보다 더 안타까운 환경에 있는 여성들의 생명도 중요하지요. 둘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게 어디 있나요. 당연히 둘 다 중요하지요. 이게 무슨 질문거리나 되나요?”

대부분의 사람은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또한 기독교의 창조 섭리 기반을 지키는 일을 누가 소홀히 여기고 싶겠어요. 중요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처럼 때로는 영혼을 사랑하고 살리고 봐야 하는 케이스도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자 무시하지 못할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조그맣습니다.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없을뿐더러, 한정된 시간 안에 모든 사람이 같은 수준의 이해에 다다를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어차피 다 불가능한 것이라면,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본을 하면서, 이 과정을 지나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사랑으로 행하고, 겸손히 상대를 존중해 줍시다. 상대를 볼 때, 내가 모르는 무슨 숨겨진 음모를 가지고 나의 반대쪽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와는 다른 경험,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이 다른 것을 보고 느끼게 하시고 부르셔서, 내가 할 수 없는 주님의 일을 하게 하셨다는 진심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봐주면 어떨까요? 그 외의 남은 힘은 모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쓸 궁리를 하면 좋겠습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email protected]로 이메일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더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  

선교
2025년 4월 23일, 정희수 감독이 이끄는 오하이오 감독구 지도자들이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아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와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를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사진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제막된 윌리엄 밴턴 스크랜턴 선교사와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기념비.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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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심
6월 둘째 주는 ‘한반도평화옹호주간’이다. 이를 위해 5월 29일 오후 8시(미 동부 시간 기준)에 미연방하원의원 및 상원의원실 직원들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공개 교육을 진행한다. 지난 2018년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미국 워싱톤 DC에서 열린 한반도평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한반도의 평화를 외치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연합감리교회 사회부 연합감리교인들에게 ‘한반도평화옹호주간’ 적극 참여 요청

6월 둘째 주는 ‘한반도평화옹호주간’이다. 이를 위해 연합감리교회 사회부와 세계선교부를 비롯한 연대 기관들의 연합체인 액션네트워크(Action Network)는 5월 29일 오후 8시(미 동부 시간)에 연방하원의원 및 연방상원의원실 직원들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한 온라인 공개 교육을 화상(Zoom)으로 진행한다.
개체교회
뉴욕의 후러싱 제일 연합감리교회는 개체 교회 사역에 새로운 영감과 활력을 불어넣고 도약할 수 있도록 돕는 ‘마중물’인 <희년사역기금> 10만 불을 마련하고 신청을 받고 있다. 사진은 웨스트버지니아주 찰스톤 시청 앞에 설치된 지밀루 메이슨의 작품 도약(Cabriole).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뉴욕 후러싱 제일교회, 희년사역기금 10만 불로 작은 교회 도약 돕는다

뉴욕의 후러싱 제일 연합감리교회는 개체 교회 사역에 새로운 영감과 활력을 불어넣고 도약할 수 있도록 돕는 ‘마중물’인 <희년사역기금> 10만 불을 마련하고 신청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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