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이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7-12)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연합감리교회 이름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각자의 파송 지역에서 섬기면서, 추수의 계절을 맞아 헌신하는 여러분을 특별한 총회에 초대하고, 여러분과 함께 한인연합감리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을 하나님이 주신 특권으로 여기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총회를 위해서 크게 수고하고, 정성껏 준비해 주신 많은 지도자 여러분께 총감독회의와 한목협을 대신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준비위원들뿐만 아니라 모든 한인 공동체 일원들이 쉼 없이 기도하고, 때로는 눈물로 회개하고 참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도에 대한 새로운 다짐, 아니 다시 주의 부름을 받은 새로운 제자로 다짐하기도 한 그런 긴 강을 건너 여기까지 왔습니다.
수십 통의 전화를 돌리면서 후배 동역자들에게 권면하신 선교감리사님도 계신다는 소식은 뭉클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바로 서로서로 초대하면서 우리가 여기 모인 것입니다. 물론 주님 예수께서 우리를 초대하여 여기 모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강력하게, 그리고 뜨겁고, 아주 새롭고 신선하게 임하셔서 다시 성도의 기쁜 생활, 사명자의 뜨거운 가슴,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고백이 집결되어 연합감리교회의 새로운 운동으로 발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는 한편 연합감리교회 안에서 초기 교회가 보여준 나눔과 섬김, 복음 증거의 자세가 온전히 유지되어 왔는지도 냉정하게 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부터 우리 교회는 중산층의 교회, 깔끔하고 화려한 교회, 가난한 이들이 쉽게 들어오기 힘든 문턱 높은 교회가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일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성령께서 직면한 우리 문제를 겸허히 경청하고 반듯하게 식별하며 올곧게 응답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새로운 교회를 향한 화합과 성장으로 이끌어 주시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로 새로 나기 위한 노력의 원천이자 힘은 교회를 세우시고 이끄신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이번 총회를 통하여 고민하는 은총의 진솔함을 함께 나누기를 소원합니다.
한번 아멘으로 응답하여 보시지요.
여러분은 성서의 전승 속에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십니다. 아멘
여러분은 공교회가 여러분의 은사를 시험하고, 인증하고, 교회의 지도자요, 일꾼으로 삼으신 거인들이십니다. 아멘
여러분을 주님이 부르시고, 천국의 확장을 위해서 쓰시며, 최고 은사의 사람이라고 여러분의 이름을 다시 부르십니다. 아멘
연합감리교회가 우리의 성스러운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사명을 가지고 행복하게 섬기라고 오늘 다시 여러분의 영을 깨우십니다. 아멘
부족하지만 새로 채우시고 세우시는 주님을 믿기에, 당당히 여기 함께하였습니다. 아멘
우리가 넘어질 때 다시 손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생명의 주님이 ‘용서받은 죄인들’인 우리에게 거듭남의 능력(Born Again Power)으로 함께하십니다. 아멘
주님이 이 시대에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에 거룩한 소명을 주신 사명자들이십니다. 아멘
우리 교회는 열린 교회이고, 이민 역사 130년 동안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강한 영적 중심이 된 연합감리교회를 사랑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고, 종된 저희 위에 꿈과 능력으로 함께하는 카리스마 축복이 이 대회를 위하여 임하시기를 간구합니다.
마가복음 2장의 치유 사화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역사 현실에서 강력한 시사점을 제시합니다. 교단 탈퇴라는 비통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오늘 저는 교단의 현실이 마가의 역사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혼란과 아픔의 현실과 다르지 않아 오늘의 우리를 2장의 중풍 병자의 모습과 대비하여 보았습니다.
I.
우선 복음서에 기대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전한 치유자이시고, 인간의 해방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신학적인 고백과 확신을 증언하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3절)
저희가 오늘 중풍 병자처럼 마비된 교단을 어깨 위에 메고 예수 앞에 왔다고 하면 어떨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다시 예수의 전인적인 치유와 해방의 역사를 다시 믿고 그 기이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교회의 미래를 재확인하여 봅니다.
교회의 미래는 근원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과 해방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세웠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여러분을 일으켜 주시고, 리더십의 은사를 주시고, 풍요로운 목양의 꿈으로 복음의 사역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연합감리교회의 미래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그 은혜에 간절히 매달려야만 권위 있는 회복과 변혁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단의 미래를 정치적인 수완에 맡기는 교단 정치는 더 이상 아닙니다.
교단의 미래를 각기 다른 문화적 전승과 차별에서 오는 인위적인 논쟁과 이념적인 것에 기대는 것도 아닙니다.
교단의 미래를 대중적인 팍스 크리스텐덤(Pax Christendom),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연장으로 바라보고, 대중적인 환심과 종교적인 대중성(Popularity)에 의존하는 교회 성장 신화에 맡기는 것도 아닙니다.
교단의 미래는 복음을 윤리적인 범주와 우리와 다른 사람을 또 다른 윤리 규범 상자에 가두고 심판하는, 인류의 허상과 배타적인 정죄의 가치로 좁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화해입니다. 교단의 미래는 인정입니다. 교단의 미래는 우정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회개와 자기 성찰입니다. 교단의 미래는 평화입니다. 교단의 미래는 생명과 생태계의 온전한 해방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다양성(Diversity)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를 통한 하나 됨(Unity)에서 신학적인 해석학의 틀을 꿈꾸게 합니다.
교단의 미래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 믿고 실천하는 순회하는 전도자, 요한 웨슬리의 꿈으로 부활하는 영적 각성의 기도 속에 속합니다. 가난한 자들의 복음, 약한 자들의 복음, 소외된 자, 소자들의 복음으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우리는 교단의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서를 한 손에 들고, 신문, 한 손에 들고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균형 잡힌 신학과 신앙으로 들고 씨름하며 우리는 교회의 미래를 보게 됩니다.
성령이 여전히 우리를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만져보지 못하고 느껴보지 못한 열린 신비를 향하여, 우리를 초대하시고, 부드럽게 우리를 그 나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 세계는 정녕 환희와 기쁨으로 넘쳐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4)
우리의 미래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복음으로 인정하는 방언, 천국의 비전을 담대하게 전하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할 때,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II.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4절)
우리가 다 함께 지붕을 뜯고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살려야 하고 살아야 하고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지속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마가복음 2장을 읽으면서 저는 자주 친구들의 손에 실려서 예수께 데려간 중풍 병자가 바로 나로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간 예수님 당신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아주 간절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그분께 달려간 일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때를 뒤돌아보면, 인생길에서 만난 여러 동역자들의 충일한 기도와 나누어 준 사랑이 있었기에 그 기적이 가능하였습니다.
서로를 돌보는 동역과 우정, 사랑의 관계를 다시 떠올립니다. 지난 세월 목회하면서 받은 것을 기억하니 저는 자주 상에 누운 중풍 병자였고, 동역자들, 감리사와 감독들이, 그리고 함께 섬긴 평신도 지도자들이 저를 상에 누인 채 주님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내고, 구멍을 낸 것과 같은 지극한 돌봄과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종국 예수님으로 인하여 제가 치유함을 얻었고, 또 걷게 되었다는 신앙 고백을 지금은 자랑스럽게 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 ‘남은 자’ 된 연합감리교회에 속한 우리들이 서로를 더 절실하게 사랑하고 돌보고, 세우고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는 끈끈한 관계의 사람들이라고 결단하고, 더 적극적으로 뜨거운 손을 맞잡는 그런 은혜의 결속이 바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깊은 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한 보스턴 신학교 다나 로버트(Dana Roberts) 박사의 말처럼, 저는 이번 교단 분리의 때를 마주하면서 우정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정 때문에 서로 손을 잡고 여전히 사랑하는 고백의 우정을 가지고 힘든 때를 넘기기도 했지요. 우정이나 충정, 또 제자도의 선명한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공동체를 아프게 하고 실망하게 한 이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일어서게 해주십시오. 목회 인생에서 함께하는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우정을 통하여 다시 일어나 걷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다시 이 상을 걷어치우고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III.
베드로전서 2장의 본문은 ‘남은 자’의 신앙 전통에서 가장 숭고하게 남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는 자니라.” (2:9-10)
저는 오늘 다시 남은 자의 신앙 역설로 메시지를 마무리합니다.
성서적 전통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가 당면한 미국의 현실 속에서 성령의 가르침을 다시 새기고, 새로운 신앙 운동의 축에 한인연합감리교회의 정체성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저서, <Reality, Grief, Hope(현실, 절망, 그리고 소망)>를 통해 대재앙과 마주한 설교자를 고대 이스라엘로 끌고 가서, ‘무엇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설교자의 임무로 남은 자에 대한 실상을 바로 보고 상실과 실패를 인지시키는 것이야말로 선지자의 또 다른 직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마주한 재앙적 현실에서 우리는 상실과 실패를 정확히 인지하고, 역사 속에 다시 남겨진 자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삼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불안은 무절제한 개인의 탐욕, 복지와 공공선의 몰락에 아랑곳하지 않는 극도의 이기주의, 폭력의 정당화(예를 들면 총기 합법화), 단순한 윤리와 질서로 유지되던 옛 세계에 대한 향수, 그럼에도 몰락에 대한 어렴풋한 두려움으로 표출됩니다. 그런데 다가올 파국을 어느 정도 인지하며 불안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 탓을 탐욕과 이기주의, 그리고 옛 질서가 아닌 약자들에게 돌려버립니다.
그렇게 미국의 새로운 질서에 동등하게 편입되어 함께 미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할 이웃인데, 아직 주변부에 있으며, 낯설며 약자의 입장에 놓인 이슬람교도, 이민자들, 성소수자들을 공격합니다. 이런 문화적 신학적 배타주의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선지자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미국 교회는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결국에는 파괴될 옛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
이때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거짓 샬롬과 참 샬롬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월터 브루그만은 ‘새로움(Newness)’이 그 기준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실제, 새로운 인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예레미야도 새로운 언약 공동체를 말했고, 이사야는 새로운 샬롬의 도시를 말했으며, 에스겔 역시 새로운 성전을 언급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원치 않는 위기로 걸어가고 있음과 그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움으로 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 이러한 것에 대한 간결한 표현이 바로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사명에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렘 1:10).’
이러한 이중적 사역은 이데올로기가 깨어지고, 공동체가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려고 할 때 가능하다.”
오늘, 이 특별한 한인총회를 열면서 이렇게 여러분과 제가 기도합니다.
주님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십시오. 저희가 순종하겠습니다. 저희가 성령의 능력을 따라 모험하고 마음을 활짝 열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미국 교회의 심장부에 들어가 예수의 복음으로 이 나라를 개혁하고, 세계를 당신의 사랑으로 변혁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다시 이 저녁에 저를 예수의 제자로 이름하시고, 그 거룩한 사명자의 삶을 살게 도와주십시오. 아멘.
동영상으로 정희수 감독의 설교를 포함한 개회 예배 전체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O2ri7Hxm8r0
김응선 목사는 연합감리교뉴스의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입니다. 연합감리교회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를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