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의 소리굽쇠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연합감리교뉴스의 파일럿 시리즈인 <영화와 설교> 시리즈의 첫 번째로, 독일 영화 <신과 함께 가라>를 통해 삶의 방향성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는 김선중 목사의 글이다.)  

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

평생을 낙오되지 않고 제대로 된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이런 마음의 바람을 담아 헤어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이라고 평안을 빌어줍니다. 바로 우리가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말 “Good Bye!”는 축복이 담긴 이별의 말 “God be with you!”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신)과 함께 가라>(Go with God)는 제목의 독일 영화(Vaya Con Dios)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수도사가 경험하는 방향 정위(Orientation), 방향 상실(Disorientation), 원방향으로의 복귀(Reorientation)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상으로 설정한 칸토리안 교단은 “성령은 소리이시니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를 규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나오는 “당신만이(Tu solus)”라는 곡은  오직 주님만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고,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시며 돌아갈 곳이기에, 인생 여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전 과정에 오직 주님만이 믿음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대상이라 고백하며, 절대적인 기준과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단에서 파문당한 이 교단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단 두 곳의 수도원만을 두고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독일의 수도원에는 수도원 원장과 예수회 출신의 벤노, 농촌에서 살다 14살에 수도원에 들어온 타실로, 그리고 갓난아이 때 이곳에 맡겨진 아르보 4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방향 지워진 그들의  삶에 어느 날 위기가 닥쳐옵니다. 아침 미사를 드리던 중 들이닥친 빚쟁이가 3주 안에 수도원의 빚을 갚으라고  통보하고, 그 충격으로 원장 수도사는 죽음에 다다르게 되고, 목에 걸고 있던 소리굽쇠를 아르보의 목에 걸어주며, 그 교단의 보물인 교황 우르반의 규범이 담긴 교단 종규집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리고 아르보와 벤노 그리고 타실로는 만만치 않은 세상에 던져진 신세가 됩니다.

함께 길을 나선 세 명의 수도사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모두 주저앉습니다.

영화 “신과 함께 가라”의 한 장면 갈무리. 영화 “신과 함께 가라”의 한 장면 갈무리.  

여행을 시작하자 30년 전 집을 떠난 타실로는 노모가 살아계신 지 잠깐 들려 확인하길 원했습니다. 30년 만에 노모를 대면한 타실로는 혈육의 정 앞에 흔들리게 되고, 이탈리아로 가는 여정에서 벗어나 노모 곁에 남게 됩니다.

여행 시작에 만난 기자 키아라의 도움으로 기차역에 도착한 벤노와 아르보는 기차를 바꿔 타는 방법을 몰라 중간 기착지에 내려 길거리에서 초라하게 밤을 새웁니다.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있던 벤노를 그의 예수교 신학교 동창인 클라우디우스가 발견하고, 자신이 교장으로 있는 신학교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나 그의 동창은 이들을 척결해야 할 이교도로 여기며, 교황 우르반의 규범집을 노립니다. 동창의 꼬임에 넘어간 벤노는 여정을 포기하고 아르보와 함께 신학교에 주저앉고 맙니다.

그 사이 타실로는 일반인의 삶에서 수도사의 삶으로 되돌아오고, 연락을 받고 온 키아라와 타실로와 아르보는 신학교의 미사에 참석합니다. 미리 반주자에게 미사에 예정된 찬송가 대신 세 수도사에게 익숙한 찬송가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음악에 맞춰 타실로와 아르보가 부르자 인위적인 반주소리와 타성에 젖은 찬양소리는 사라지고, 맑고 깊게 울려 퍼지는 찬양 소리에 마음이 “공명”한 벤노 역시 동창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함께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르보의 도움으로 규범집을 가지고 무사히 신학교를 나오게 됩니다.

그들이 부른 찬송은 게오르그 노이마크(Georg Neumark)가 1657년에 작사/작곡한 찬송(Wer Nur Den Lieben Gott)입니다. 캐터린 윙크월스(Catherine Winkworth)가 1863에 영문으로 번역된 찬송가, If Thou But Suffer God to Guide Thee의 가사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믿는 자는 결코 요동치지 않는 반석을 의지하는 셈이다찬양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지 말고 따르라하나님은 참으로 자신을 신뢰하는 영혼을 필요한 순간에 절대 버리지 않으신다.”

이 찬송의 역사적 배경은 잔혹했던 30년 전쟁(1618-1648)으로, 그 성서적 배경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으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55:22)입니다. 일반인의 삶과 지식에 대한 욕구, 그리고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거쳐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되돌아가는 그 순간에 부르는 이 찬송이 의미깊게 들립니다.

아르보와 사랑에 빠졌던 키아라는 수도사의 길을 존중해 그를 떠나고, 아르보 역시 마음을 돌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세 수도자는 목적지인 이탈리아의 수도원에 도착하게 됩니다.  

가방에서 소리굽쇠를 발견한 키아라는 자신의 아르보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고, 이탈리아의 수도원으로 소리굽쇠를 우편으로 보냅니다.

한편, 이탈리아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함께 “당신만이”를 찬양하던 중 소리굽쇠를 전달받은 아르보는 키아라를 만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고, 벤노와 타실로는 슬픔과 결연함 그리고 거룩함이 버무려진 표정으로 눈물을 참으며 “오직 주님만이 돌아갈 곳입니다.”라고 찬양합니다.

“성령은 소리이시다.”라는 그 교단의 신조처럼 원장이 목에 걸고 있던 소리굽쇠는 수도사들이 성령의 소리를 따라 함께 공명하면서, 그들을 본래의 방향으로 이끄는 상징입니다. 소리굽쇠(tuning fork)는 고유한 진동수의 음을 내기에 악기를 조율할 때, 기준음을 내는 도구로 사용되는데, 신기한 것은 소리굽쇠가 울릴 때 주변에 있는 같은 진동수의 물체는 함께 공명 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어쩌면 키아라를 향해 떠난 아르보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승화되어, 다시 방향을 찾기 원하는 마음 깊은 곳의 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베드로의 이야기(요 21:15-19)도 방향을 잃었던 베드로가 소리굽쇠의 공명 효과로 다시 그 방향을 찾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형 안드레를 통해 만난 예수가 꿈에 그리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확인한 베드로는 예수의 부르심을 좇아 갈리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반인의 삶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섭니다. 그의 인생이 주님을 향해 방향을 잡은 순간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고 의리 있을 뿐 아니라 충성스러울 만큼 마음이 뜨거웠던 베드로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그가 쓰라리게 겪은 내면의 갈등을 재구성해 보면 아마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나는 남자, 예수를 따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 그가 이름을 불렀을 , 벅차게 뛰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있을까. 그의 뜨겁게 불타는 꿈을 보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있었고, 그가 기적을 행할 때마다, 마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그에 대한 충성심은 무르익었지. 군중이 그에게 몰려들 때마다 내가 그의 제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웠어.

다만 그가 자신의 십자가 운명에 대해 말할 때는 마음 한편에 불안이 엄습했지만, 그가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었던 나는 그가 무언가 놀라운 일을 행하리라 믿었기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의 곁을 지켰지.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어쨌든 그는 나에게 모든 것이었고, 이곳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는 마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듯해서 가슴이 벅차올랐었어.

그런데 지금 그는 무기력하게 체포되어 저렇게 초라하게 있어. 사람의 진짜 정체가 무엇일까? 지금까지 3년을 따라다니며 마음에 품었던 나의 꿈은 결국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베드로는 예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세 번 받았고, 세 번 다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하던 순간 예수의 예언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똑바로 쳐다보셨습니다.(눅 22:61)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한 쌍의 눈은 방향을 잃고 슬퍼하는 연약한 인간 베드로의 것이었고, 다른 한 쌍은 그런 베드로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한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습니다. “그렇지, 베드로야? 그게 바로 너란다.”

다시 영화로 돌아갑니다.

30년간 생사를 모르던 노모가 홀로 사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고 아들로서 어머니를 돌보고 싶은 타실로의 마음, 궁핍한 수도원에서는 채울 수 없었던 지식욕을 모든 것이 갖추어진 신학교에서 마음껏 충족시키고 싶은 벤노의 소망,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아닌 그에게 주어진 길이었던 수도원에서의 삶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이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려 했던 아르보의 외침은 우리가 살면서 직면하는 당연한 삶의 욕구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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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타실로의 혈육에 대한 애틋한 정과 벤노의 음악에 대한 지식욕 그리고 아르보의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방향 이탈을 저는 비난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천대받던 갈릴리 땅에서 생활하던 베드로에게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추구할 만큼 절박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 같은 사회의 가장 작은 자를 품으시던 주님,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조차도 다스리시며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던 주님을 보며, 이제 정치 권력만 가지면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던 베드로가 메시야 운명을 운운하시며 불안하게 하시더니 결국 무기력하게 체포되어 죽을 운명에 빠진 주님을 보았을 때, 그 주님을 부인했던 심정도 이해할만합니다.   

이렇게 인생길에 생기는 당연한 욕구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기에 예수조차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자신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빵, 권력, 기적이라는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기본 욕구들이 삶의 전부라고 악마는 속삭이며 예수로 하여금 지향하는 바를 잃게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주님은 그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즉, 삶의 현실적인 욕구는 우리의 삶을 이루는 당연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인생의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며, 인생의 필요조건이 항상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사랑의 힘(Power of Love)”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힘이 세상을 굴러가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을 당신은 기쁠 거예요사랑의 힘은 때로 강하고 갑작스럽고 잔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삶을 구할 거에요.”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가 중요하겠지요?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부활의 소리굽쇠로 사랑의 소리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아침 식사 후 주님이 베드로에게 던진 세 번의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 번에 걸친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사용된 “사랑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처음과 두 번째 질문에 쓰인 “아가페(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와 세 번째 질문에 사용된 “필리아(philia)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대답에 쓰인 사랑한다는 단어는 세 번 다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두 단어가 서로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라 말하지만, 영화의 수도사들과 베드로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그 두 단어의 의미는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필레오의 파생어들이 우정, 애호, 입맞춤의 뜻인 것을 생각해보면, 아가페와는 다른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의 문답 이후에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주님의 의도를 이렇게 재구성해봅니다.

베드로야. 물론 네가 필리아의 사랑으로도 소명과 제자직을 감당할 있지만, 그건 오직 네가 힘으로 스스로 옷을 입고 원하는 곳으로 있는 그런 상황에서만 타당할 뿐이며, 한계가 있단다. 그러니 네가 강제로 입혀지고, 가기 싫은 곳으로 강제로 끌려가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되면, 필리아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너는 결국 나를 또다시 부인하고 제자직에 실패할 것이다. 기억하니? 나를 향해 위를 걸어오던 순간을. 그러나 결국 물에 가라앉게 너는 필리아의 사랑으로, 그런 약한 믿음으로 종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나는 너를 새롭게 빚고 있다. 너는 결국 아가페의 사랑으로 무장될 것이고, 나의 영으로 거듭날 것이다. 나는 네가 어떻게 끝을 마무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알고 있다.

유세비우스같은 초대교회의 역사가들은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두 팔이 벌려진 채 죽임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영화 <쿼바디스>(Quo Vadis)의 마지막 장면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소리에 공명한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순교할 때까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부활절은 잃어버린 본래의 방향을 다시 찾아, 필리아에서 아가페로, 부인에서 믿음으로, 상처에서 치유로, 실패한 제자에서 신실한 제자로 옮겨가라는 초대입니다.

우리 부활하신 주님이 가지신 소리굽쇠가 울려 퍼질 때, 그 사랑의 소리에 공명하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대의 말씀이, 그 사랑의 울림이 느껴지시는지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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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교단 분열이 임박한 가운데 뉴욕 후러싱제일교회의 김정호 목사는 나가든 남든 예수 잘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구 그래픽, 오픈클리파트-벡터스/픽사베이, 그래픽, 로렌스 글래스, 연합감리교뉴스.

뭘 위해 나가고, 남으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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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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