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오라

편집자주: 김영봉 목사의 2019년 4월 29일 한인총회 개회 예배 설교를 독자들과 함께 나눈다.  

마가복음 16:1-8

 

1.

이렇게 귀한 자리에서 존경하는 선후배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제게 이런 배려를 해 주신 한인총회 임원진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그 지방 목회자 모임에서 설교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선배 목회자들 앞에서 설교하려니 도무지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은퇴하신 아버지 목사님에게 전화하여 여쭙니다.

“아버지, 선배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설교해야 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떨리기만 하고. 어쩌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대답하십니다.

“걱정하지 말고 아무 말이나 해. 목사들, 다른 사람 설교 안 듣는다.”

“특히 감리교 목사들이 심하다.”

저도 이 조언을 믿고 마음 놓고 아무 말이나 하고 들어가려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냥 듣는 척만 해 주시면 제게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인연합감리교회는 아주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민 인구의 현저한 감소입니다. 앞으로 한국 상황과 미국 상황에 전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이민 인구 감소는 계속될 전망입니다. 중소 도시의 한인 인구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도시의 경우는 조금 낫다 할 수 있습니다만, 이 지역에는 고령화로 인해 침체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한인 이민 교회의 전성기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한인연합감리교회를 섬기는 목회자 중에는 교회의 마지막 생명줄을 붙들고 있는 듯한 상황에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교회의 현실이 열악해도 열심히 해 볼 만한 대상이 있었는데, 이제는 선교 대상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대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도 있고, 개척의 성공 사례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절대다수는 정체 혹은 쇠락의 상황에 몰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우리 교단은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2019년 특별 총회 이후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따로 협의회를 만들어 공동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이러한 입장에 대해 반대하는 한인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인교회 목회자들 사이에도 의견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은 극단적인 No와 극단적인 Yes 중에서 하나를 택하도록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연합감리교회는 어떤 식으로든 분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그 와중에서 한인교회들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 목회자들도 서로 갈라서야 하는 상황에 서게 될 전망입니다. 이번 특별 총회에서의 결정은 어떤 식으로든 머지않아 뒤집어질 것이 분명한데, 그럴 경우 한인연합감리교회들은 어떤 입장에 서든 또 한 번 심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타인종 교회를 섬기는 한국계 미국인 목회자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타인종 교회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목회자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계 미국인 목회자들은 대부분, 도심권 교회이든 시골 교회이든, 쇠락 일로에 있는 교회에 파송 받아 고군분투합니다.

어떤 분은 타인종 목회를 ‘호스피스 목회’라고 부릅니다. 존폐 위기에 놓인 교회에 파송 받아 교회의 임종을 맞을 때까지 교인들을 보살피는 것이 목회 활동의 전부입니다. 젊은 목회자들이 시골 교회에 파송 받아서 하는 일이 주로 병원 심방과 장례식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한 해에 장례식을 열 번도 넘게 치른  다음에 우울증이 와서 잠시 쉬어야 했습니다.

쇠락하는 타인종 교회를 섬기면서 열정을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미국 문화에서 목사의 존재감이 가장 빛나는 곳은 장례식장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믿는 사람들 같고 목사는 그 자리에서 무게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차갑게 돌아서고 목회자의 존재감은 순식간에 증발합니다.

그럴 때면 ‘내가 무엇 하고 있나?’라는 자괴감이 들지요. 이런 감정은 타인종 교회를 목회하는 한인 목회자들만의 감정은 아닌 듯합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와 윌리엄 윌리몬이 Resident Aliens라는 책에 이렇게 쓴 한 대목입니다.

목회자는 기껏해야 court chaplain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고, 여러 가지 문화 행사들을 주관하면서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통과 의례들을 치러 내는 부속물로 전락한다. 더구나 그런 예식에서 목회자가 하는 말은 사람들이 뻔히 아는 것이기에 그 예식에 왜 목회자가 필요한지 갈수록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형편이다. 또 목회자들은 성전 매춘부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지기도 한다. 성공 지향의 따분한 중류층 사람들, 특히 물질주의에서 비롯된 불안감을 벗어 버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대가로 사랑을 파는 사람들 말이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18

아마도 이것은 실제 목회를 해 보았던 윌리몬 교수가 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짧은 기간 동안 타인종 교회를 섬긴 후에 한인이민교회를 섬겨 왔습니다만, 타인종 목회 현장에서뿐 아니라 한인이민교회 목회 현장에서도 이와 같은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듣고 싶은 설교를 해 주고 그 대가로 먹고사는 것 같은 느낌은 성전 매춘부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2.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목회자들은 대부분 한국 교회의 전성기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교회 깃발만 꽂으면 부흥했고 기적적인 성공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목회자가 되기를 꿈꾸며 신학교의 문을 두드린 사람 중에는 자신이 그러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될 꿈을 꾼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단마다 롤 모델로 부상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거대한 성장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미국 교회의 영성에 지배받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 세대 전부터 초대형 교회를 일군 목회자들이 미국 교회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교계 한쪽에서는 물량적 성장이 목회의 성공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인기 있는 기독교 저자들의 프로필에는 어김없이 자신의 교회를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성장시켰는지를 소개하는 문구가 들어가 있습니다. 물량적 성공이 곧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이고 능력의 판단 기준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세대는 이와 같은 성장주의 모델을 따라 목회의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선배 목회자들은 성장주의 모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이 목회를 꿈꾸며 신학을 공부한 시절의 교회는 대부분 열악했습니다. 그분들은 물량적 성장을 꿈꾼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헌신을 꿈꾸었습니다. 70년대 이후로 그러한 헌신적인 목회가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물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고 대형 교회가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 목회 현장에 있는 우리 세대는 성장주의적 모델을 ‘정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계속 성장하면 머지않아 민족 복음화의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많은 이들이 그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저는 이것을 ‘크리스텐덤 패러다임(Christendom Paradigm)’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 세상을 점령하여 다스리는 데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다수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믿는 이들이 힘을 합하여 기독교 국가를 세워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도시 국가 로마처럼 교회가 곧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수장이 곧 국가의 수장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와 선교의 목적은 기독교국가의 세력을 땅끝까지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미국 교회도 그렇지만 한국 교회도 이러한 열망과 꿈과 믿음으로 분투해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오해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대의 자식”입니다. 우리 시대를 규정하고 있는 지배적 정서와 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철두철미 성장주의적 모델로 목회를 하는 사람도 있고, 그 모델을 경계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받고 있습니다.

미국 개척 시대에 한 지역을 점령하여 마을이 형성될 때면 가장 먼저 도시 중심에 혹은 높은 언덕에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그것을 본받아야 할 위대한 청교도의 유산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물론, 자신의 인생을 믿음의 기초 위에 두려는 태도는 마땅히 칭찬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목표가 문제입니다.  

생각이 이렇게 고정되고 나면, 교회는 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힘을 탐하기 시작합니다. 정치 권력과 야합하게 되고, 돈의 힘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 땅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고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큰일을 하려면 물량적으로 성장해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서구 교회가 제3세계에 총과 칼을 앞세우고 복음을 들고 들어간 이유입니다. 그러한 선교 방식을 통해 얻은 것은 명목상의 신자들과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혐오뿐입니다. 지금은 그러한 과오에 대해 충분히 반성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칼과 총을 들고 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돈의 힘을 사용하여 기독교 국가를 확장하려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지금 우리가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바로 이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에 하는 걱정입니다. 이 패러다임 안에서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당면한 상황은 위기입니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교회는 항상 성장해야 합니다. 개척하면 어김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 앞에 사람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한 타운의 지도자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 타운의 실질적인 일상사에 의미 있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는 계속 쇠락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미국 통계에 따르면 미국 인구 중에서 ‘종교가 없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수가 제일 많습니다. 그다음이 천주교인이고, 그다음이 복음주의 교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예외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있지만, 그 경우도 대개는 수평 이동을 통한 성장입니다. 개척하면 어김없이 고전하고 실패합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고, 떠나는 사람만 늘어갑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 귀담아듣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제는 거부당하고 무시당할까 싶어서 입을 열어 전도하기도 겁이 납니다. 교회 바깥사람들은 고사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목사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장례식이나 결혼식 혹은 다른 타운 행사에서 가끔 중요한 역할로 부름 받기는 하지만, 행사가 끝나고 나면, 윌리엄 윌리몬이 말한 것처럼, 성전 창녀가 된 것 같은 느낌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량적인 성장을 이룬 사람들은 행복합니까? 초대형 교회를 이룬 사람들 혹은 그런 교회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 중에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육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로서의 화려함 뒤에 숨겨져 있는 사적 생활의 미저리는 때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초대형 교회를 일구는 것이 많은 경우 교회와 신앙의 본질을 포기했다는 증거라는 데 있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즈와 윌리엄 윌리몬은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에서는 목회에 실패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성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형 교회 목회자들 혹은 성장하는 교회 목회자들은 억울하게 느낄지 모릅니다. 제가 그런 자리에 있어 보지 않았다면 패배자의 질투심의 표현이라고 폄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어 본 사람 중에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 있어서 성장의 경험은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는 아주 은밀하고 불순한 유혹이 숨어 있습니다. 순수한 헌신과 열정만으로도 물량적 성장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성장을 키워가고 유지하려는 노력은 자주 곁길로 나가게 만듭니다. 그런 점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즈와 윌리엄 윌리몬의 말을 너무 억울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3.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더 열심을 내는 것도 좋고 더 효과적인 전략을 세우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서 혹은 그 모든 것 위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못 해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목회자와 성도들을 그릇된 길로 오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크레스텐덤 패러다임과는 반대편에 있습니다. 그 복음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같은 존재들이 세울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이미 태초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지금 우리의 눈에 가려져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그 나라를 보고 그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삽니다. 우리의 복음은 그 나라를 보게 하고 그 나라를 살게 하자는 데 있지, 그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하자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의 복음은 권력도, 군사력도, 돈의 힘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그런 것으로 전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 힘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으로만 전할 수 있습니다. 강요와 강압이 아니라 감동으로만 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찮게 취급을 받았고 때로는 거부당하고 무시당하고 때로는 박해를 받았습니다. 세상 바깥으로 밀려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밀려난 그 곳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가 퍼져 나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 인구의 쇠락을 걱정하고 있고, 교회의 쇠퇴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본다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그리고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한 사람들은 당시 사회에 절대적 소수였습니다. 로마에서, 고린도에서, 에베소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주일마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던 초대 교인들은 당시의 인구 센서스에 통계 수치로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기독교 국가를 이루어 세상을 지배할 아무런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고 또한 그 은혜로 이웃을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이 소수자라는 사실을 위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기는 교인 수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재정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목회자의 연금 지급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그들에게는 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위기는 차별과 소외와 박해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었고, 믿는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서로 헐뜯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었으며, 이단자가 들어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교회를 교회 되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이 신앙과 목회와 교회와 선교에 대해 가지고 있던 믿음을 저는 ‘슬레인 램 패러다임(Slain Lamb Paradigm)’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좌를 봅니다. 그 보좌에는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있었고 그 가운데 어린 양이 서 있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 어린 양에게 두루마리를 넘겨주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와 둘러선 천사들이 입을 모아 어린 양을 찬양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계 5:12)

그 후에 사도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십사만 사천 명의 성도를 봅니다. 십사만 사천은 12 에 12를 곱하고 다시 1,000을 곱하여 나온 수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수가 완전하다,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모두 흰 두루마기를 입었습니다. 그들에 대해 장로 중 한 사람이 사도 요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계 7:14-15)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가지고 살아가고 목회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다가와 장차 왕국에 세워질 때 자기 형제를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청했던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반문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막 10:38)

죽임당하신 어린 양처럼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백성답게 살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목회자들께서는 이 본문에 대해 적어도 몇 번은 설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할 때 우리 자신의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내려놓으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이 실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해 보셨는지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느니, 구령의 열정이라느니,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린다는 미명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중심이 되려고 몸부림친 것은 아닌지요? 그렇게 하여 성공한 사람은 영적으로 텅 비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하여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패배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4.

이런 문제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었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스탠리 하우어워즈와 윌리엄 윌리몬이 그 예입니다. 드류 대학교에서 가르치셨던 고 이정용 교수님도 그 예입니다. 이분들은 오늘날 교회가 처한 소수자의 상황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동안 젖어 있던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버리고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는 기회라고 했습니다. 1996년에 낸 <Marginality>라는 책에서 이정용 교수님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중심부를 추구하는데도, 역설적으로 오늘날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더욱 주변화되고 있다. 교회는 더는 강력하지 않다. 오히려 목소리는 점점 영향력이 줄고 있다. 교회가 이제는 중심성의 중심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주변으로 돌아감으로써 교회는 새로운 주변부 사람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주변성>, 204-205쪽)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는 사실을 우리 가운데 있던 예언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깨우쳐 주었는데,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크리스텐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위기의 현실이 실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는 것입니다. ‘위기’라는 한자가 ‘위태롭다’는 뜻의 ‘위’와 ‘기회’라는 뜻의 ‘기’가 합쳐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위기는 곧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이며 우리가 받은 부름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가 지금 당한 처지는 우리가 그리고 우리 교회들이 진짜가 되는 기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마가복음의 빈 무덤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부활의 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두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천사를 만납니다. 그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막 16:6-7)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부르십니다. 갈릴리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자리에 있었고 또한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밀려난 사람들, 뒤처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암 하아렛츠’라고, ‘땅의 사람들’이라고 하시(下視)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사명을 이루신 후에 다시 그곳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그곳에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으십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러 당신의 사명을 완성해 가시는 동안 제자들은 철저히 실패합니다. 예수님은 죽임당하신 어린 양으로서 당신을 드리려 하셨는데, 제자들은 위대한 다윗의 왕국을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제자들은 크리스텐덤의 꿈을 놓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라도 예수님이 떨치고 일어나 위대한 다윗 왕국을 세워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에서 영화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 꿈은 골고다 언덕에서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습니다. 그들을,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다시 부르십니다. 이제는 당신의 꿈이 무엇이고 당신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었기에 새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크리스텐덤의 꿈에 파산한 그 자리가 희망의 자리였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따르는 분이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고 희생하는 길을 갈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꿈이 깨어진 자리이기에 비로소 하나님의 꿈이 들어설 자리가 생긴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2019년의 부활절을 지내고 한자리에 모인 연합감리교회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같은 음성을 들려주신다고 믿습니다. “갈릴리로 오라! 갈릴리로 와서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

우리 중에는 십자가 처형 이후의 제자들처럼 크리스텐덤의 꿈이 깨어진 것으로 인해 실패감과 낭패감과 절망감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위기감을 조성하는 여러 가지 통계 수치로 인해 미래에 대해 걱정하며 낙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 현장에서 그 절망감을 일상으로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어 자신을 격려하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거대 교회를 일구는 일도, 개척 성공 신화의 주인이 되는 것도, 교권의 사다리를 치고 올라가는 것도 더는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냥 하루하루 버티다가 은퇴하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은퇴 연금을 계산하고 있는 자신을 목격하며 참담함을 느낍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이제는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당신들을 절망시키고 낙심시킨 크리스텐덤 패러다임을 내려놓고 이제는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백성으로 다시 시작하라고 말입니다. 이제는 성공하고 출세하고 높아지고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백성으로서 낮아지고 희생하고 섬기기 위해서 갈릴리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낮은 자리, 아픈 자리, 밀려난 자리, 냄새 나는 자리, 눈물 쏟는 자리로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그곳에 당신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니 당신을 만나려면 그곳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그곳이 우리가 서야 할 자리라고 하십니다.

우리 중에는 크리스텐덤 패러다임 안에서 열심히 분투하여 어느 정도 성취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갈릴리로 오라고 말입니다. 지금 이룬 자리를 떠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교단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라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무한 성장을 목표로 삼거나 교권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갈릴리에 눈을 두고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중심에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심에서 가장자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높은 자리에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낮은 자리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에 세우시든 그 자리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자신을 비워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높은 자리보다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중심의 자리보다 가장자리에 서는 것이 더 힘겹습니다. 잘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아픔을 요구합니다. 대접받는 자리에 서는 것보다 섬기는 자리에 서는 것이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그렇기에 자꾸만 중심으로, 높은 곳으로 가려 합니다. 잘난 사람들과 어울리려 합니다. 그것이 인간적으로 더 편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 세워졌을 때 낮은 곳을 보기도 쉽지 않고, 중심의 자리에 세워졌을 때 가장자리를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높은 곳, 중심, 잘난 사람들과 만남에는 주님이 안 보입니다. 저는 대접 받는 자리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자리에 갔을 때 주님의 임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구비된 자리에서 일하는 것은 편한 일이고 또한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곳에서도 주님의 손길을 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그렇기에 쉽게 권태를 경험하게 되고, 그 권태는 우리를 직업인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영적 사기꾼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중심의 자리, 높은 자리에 서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이 왜곡됩니다. 세상은 아래에서, 가장자리에서 보아야 제대로 보입니다.

낮은 자리, 가장자리, 어두운 자리, 눈물 많은 자리에서는 정신적, 영적 소모가 더 큽니다. 그곳에는 자존감이 배배 꼬인 성격 이상자와  사회 부적응자가 많습니다. 그들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를 주지 않고는 존재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과 함께 혹은 그들을 위해 섬기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목회를 접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섬기다가 상처받고 그로 인해 끙끙 앓으며 기도할 때 주님의 임재를 만납니다. 그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 정신적, 영적 소모는 한순간에 채워지고도 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영예를 경험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름은 주님의 고난 덕분에 축복을 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마신 잔을 마시고 주님이 받은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우리의 옷을 표백하라는 것입니다. 말만 들으면 그것은 고난에로의 부름이지만, 그것을 경험하고 보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영예로의 부름이고 또한 감격에로의 부름입니다.

이 나이쯤 되니, 저는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큰 교회를 일군 사람이나 교권의 사다리에서 제 위에 올라서 있는 사람 앞에서는 한 번도 작아져 본 적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저보다 스펙이 더 좋은 가진 사람 앞에서 가끔 주눅 들었습니다. 그 후에는 저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보다 더 후에는 깊은 영성의 사람 앞에서 초라해지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저를 작아지게 만들지 않습니다.

딱 하나, 이즈음에 저를 작아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 것을 내려놓은 사람 혹은 큰 고난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 6:17)라고 했던 바울 같은 사람입니다. 그 희생과 고난의 무게가 곧 그 사람의 믿음의 무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 수 없는 신앙의 신비를 그 사람은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고개가 숙어집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어린 양의 피로 하얗게 표백된 것 같은 사람을 만날 때면 저는 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제 옷에는 어린 양의 피 몇 방울이 튀겨 생긴 반점 몇 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5.

이 말을 불성실의 핑계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직무유기의 구실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적 나태함을 합리화시키는 논리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백성으로서 낮은 자리, 가장자리, 아픈 자리, 어두운 자리, 냄새나는 자리로 내려가 그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을 섬기려면 영적으로 더욱 치열해져야 하고 정신적으로 더 깊어져야 합니다. 육체적으로도 강해져야 합니다. 더 성실해야 하고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더 정직해야 하고 더 진실해져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활짝 열어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영적 실력이 없기에 크리스텐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자신을 은폐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는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갈릴리로 오라는 주님의 부름 앞에서 잠시 각자 자신을 돌아봅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혹은 어떤 꿈을 가지고 교회를 섬겨 왔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낙심하거나 두려워하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흥분되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성금요일을 지나 부활의 아침에 이르렀습니다. 성금요일에 우리는 크리스텐덤을 향해 살았던 우리의 꿈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되게 부활의 아침을 만났다면 두려움과 염려와 절망을 벗어났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갈릴리로 돌아가서 예수님과 함께 낮아져서 섬기고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렇게 살기를 소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과 보람과 의미는 우리가 얼마나 높이, 얼마나 중심에 가까이 가 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옷에 어린 양의 피가 얼마나 뿌려져 있느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다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위기는 기회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가장된 축복입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그러니 툴툴 털고 우리의 갈릴리로 가서 죽임당하신 어린 양의 피가 우리의 옷을 흠뻑 적시기를 소망하며 섬깁시다.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그것이 우리의 면류관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돌아가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0-11)

아멘! 아멘!

연합감리교회 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615-742-5470 or newsdesk@umnews.org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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