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연합감리교회 은퇴 목사인 유석종 목사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책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의 영문판 <REBUILDING THE FALLEN FENCE>가 출간되었다. 한국에서 감리교 목사로 안수를 받고 도미한 유 목사는 연합감리교회 목사가 되어 한인 교회와 미국 교회를 섬겼고, 캘리포니아-네바다 연회의 네바다 시에라 지방감리사로 섬기다 은퇴한 목회자다. 이 책에는 유 목사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납북되고 어머니 역시 일찍 여의며, 형제자매는 한반도 남과 북 그리고 독일과 미국으로 흩어져 이산가족으로 살아가는 비극적인 한 가족의 역사가 담겨 있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에 정착하고, 이북을 방문해 헤어진 누이와 상봉하고, 은퇴 후 아내와의 사별하는 등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유 목사 가족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유석종 목사의 이야기는 너무도 아프고 처절해서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의 진솔한 고백이자 치유의 이야기다. 유 목사는 이 책에 삶의 고비마다 겪어야 했던 아프고 애달픈 경험을 아무런 꾸밈없이 감정의 속살 그대로 기록했다. 연합감리교뉴스는 유석종 목사의 영문판 출판에 즈음하여 조정래 목사에게 한글판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 독후감을 의뢰해 여기에 싣는다.)

유석종 목사는 1937년 일제강점기에 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하신 아버지와 호수돈 여학교를 나와 유치원 교사를 하신 신식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들 다섯, 딸 다섯을 낳았는데, 아들 셋이 어릴 때 죽어, 아들 둘 딸 다섯 칠 남매가 남았다. “독립운동하려면 교회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교인이 된 유 목사의 아버지는 감리교 신학을 공부해 전도사와 병원 원목으로 섬겼는데, 일제강점기에 부귀와 영화를 추구하지 않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회자가 된 것은 큰 위험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길이었다. 해방 후에 아버지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는데, 한국전쟁 때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유 목사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와 길을 걷다가 하늘에서 B29 폭격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석종아, 너는 비행기에서 폭탄이 날아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다. 어린 석종은, “폭탄이 오면, 빨리 강물에 뛰어들어 몸을 숨기겠어요.”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나 같으면, 폭탄이 내려오면 두 손으로 받아서 강물에 던져 넣겠다.”라고 답했다. 그런 아버지의 유머와 낙천주의가 유 목사의 기억에 깊이 남아 있다. 신앙심을 바탕으로 조국 해방과 독립 국가 실현의 꿈을 품고 산 아버지는 유 목사 평생에 큰 나무로 남았다.
유년 시절에 학교에서 대머리 선생을 놀리려고 누가 “뻔대”라고 칠판에 써놓았는데, 선생님이 그걸 보고 “뻔대”라고 쓴 사람 나오라고 다그치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유 목사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성경 말씀이 생각나 자발적으로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거짓 자백을 한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모범생인 유 목사가 그랬을까 의아해하면서 훈육을 위해 유 목사를 몽둥이로 여러 차례 때렸는데, 그때 남우라는 학생이 울면서,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라고 뒤늦게 자백했다. 선생님은 남우에게, “석종이가 대신 맞았으므로, 나는 너를 처벌하지 않겠다. 오늘 석종이가 학우들을 위해 희생한 아름다운 교훈을 배웠다. 학급 해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곧은 성품과 신앙은 이렇게 자녀에게 투영되었으리라.
어머니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일제 치하에서 금지된 가곡인 ‘봉선화’를 부른 추억을 간직한 유 목사는 어머니를 우상숭배와 미신 타파 운동을 열심히 하였고, 남편이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후에는 벽제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며 자녀 교육에 헌신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믿음이 굳건한 여장부였다. 한국전쟁 때 어머니 역시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가는데, 마침 인솔하는 청년이 어머니가 가르친 제자였다. 어머니는, “이번에 우리를 살려주면 세상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자네를 책임지고 살려주겠다.”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살아났다. 어머니는 그 약속을 잊지 않았고, 그 청년이 국군에게 잡혀 재판을 받을 때 미군정에 눈물로 호소하여 청년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남편을 잃은 채 일곱 자녀를 반듯한 신앙인으로 키우는 데 힘쓴 어머니, 아이들 등록금이 없을 때는 당시 남감리교 선교사로 와 있던 윔스(Weems) 선교사에게 돈을 빌려 등록금을 내어주는 등 일곱 자녀의 교육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그 어머니는 잔칫집에 가서 먹은 상한 음식 탓에 5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고아가 된 칠 남매는 그 막막한 현실 앞에서도 쉽게 주저앉지 않았다. 부모가 물려준 명석한 머리와 신실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주어진 각자의 인생을 의연하게 개척해 갔다.
그들의 인생에서 큰 도움을 준 이가 당시 남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 있던 윔스(Weems) 여사다. 유 목사 집안 사정을 잘 알던 윔스 선교사는 아홉 살 막냇동생 석영을 미국으로 입양 보내자고 권했다. 고아가 된 칠 남매의 사정을 자기 일처럼 고민한 윔스 선교사의 제안에 형제들은 동의했고, 막내 석영은 미국 시애틀에서 판사로 일하는 감리교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9살 막냇동생을 머나먼 미국으로 보내야 했을 형제들. 어린 꼬마가 가족을 떠나 인천에서 미국행 화물선을 타고 3주간의 항해 여행을 해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을지 싶은데, 그 긴 여행길을 윔스 선교사가 보호자로 동행해 주었다.
미국 판사 가정으로 입양된 막내 석영은 처음에는 낯선 문화와 언어 때문에 힘들어했으나, 나중에 말하기를, “양부모님이 그분들의 친아들 세 명보다 나에게 더 큰 사랑을 많이 쏟아부으셨다.”라고 했을 정도로 따듯한 사랑과 아낌없는 지원 속에 훌륭하게 자랐다.
막내 석영이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인연으로, 후에 유 목사와 세 누이 가족이 미국 시애틀로 이주해 세탁업, 용접사, 영양보조사 등의 일을 하여 새로운 삶을 일구었다. 유 목사의 일대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유 목사 가족의 끈질긴 생활력,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신앙심으로 일구어낸, 한 편의 인생 승리 드라마 같은 감동을 전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격변기에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던 큰 누나와 매부는 북한으로 자발적으로 올라갔다. 전쟁 중에 매부가 사망했고, 류희정 큰 누나는 북한에서 통일시인으로 불리는 김상훈과 재혼하여 다섯 남매를 낳고 조선 문학 관련 일을 하다가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큰누나의 남편이 된 김상훈은 원래 경남 거창의 지주였던 양아버지 밑에서 자란 문학청년으로,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마친 지식인이었는데, 대지주의 후예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지주의 삶을 거부하고, 가난과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는 불우한 농민과 노동자의 편에 서기로 결심한 것이 공산주의자가 된 계기였고, 전쟁 중 북한에 가담하여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나, 전쟁 후에는 북한의 조쏘출판사 편집 과장으로 일했다.
김상훈이 북행길에 오른 여성 기자 류희정을 만났을 때, 둘 다 기혼으로 가족이 남쪽에 있는 처지라, “통일이 될 때까지만 결혼생활을 하자.”라고 약속한 후 다섯 자녀를 낳고 김상훈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34년간 부부 연을 맺고 살았다.
둘째 누나 희성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한국전쟁이 터져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희성 누이는 19세 나이로 경기도 파주시의 공산당 당선전 지도원으로 임명을 받고 활동했다.
유 목사는 “아버지는 공산당에 납치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딸이 공산주의 선전 활동을 했으니, 어이없는 일이었다.”라고 회고한다. 희성 누이는 북한에서 당선전원으로 활동하다가 정의감이 강하고 인정이 많은 데다 얼굴도 잘생긴 북한의 노력영웅 김욱찬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셋째 누나 희정은 한국전쟁 중 고향 문산이 북한군 치하에 있을 때 북한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가창대’에 끌려갔다가 가까스로 탈출하여 국군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 후 이화여대 사범대학 아동교육과를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병원의 보조영양사로 일하고, 남편은 용접사로 일했다. 힘겨운 이민 생활을 거쳐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하며 살고 있다.

유석종 목사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동기로는 부하들을 구하고자 수류탄을 안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 배우 오현경 씨가 있다. 유석종 목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에 진학하고자 했으나, 육사 시험을 앞두고 스케이트를 타다가 발을 다쳐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크게 좌절해 있을 때 “석종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려면, 군사력 못지않게 영적 재건이 필요하다.”라는 깨우침의 말씀을 들었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가 못다 이룬 목사의 꿈을 네가 이뤘으면 한다.”라는 권면의 말을 듣고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에 진학했다.
유 목사는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동기생 위연실을 만나 결혼한다. 감신대 졸업 후 기독교서회 편집부 직원으로 취업해서 일하다가, 국제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새로운 학위까지 마친다. 그러다 미연합감리교회에서 주는 십자군장학금(Crusade Scholarship)을 받고 유학을 가 시러큐스(Syracus)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다. 귀국하여 기독교서회에서 내는 월간지 <기독교사상> 주간으로 일하고, 직접 번역하고 엮은 <현대신학자 20인>, <대중운동론> 등을 출판했으며,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한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정권 밑에서 정의와 진실을 전달해야 하는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을 느끼고 미국 이민으로 돌파구를 찾게 된다.
석영을 입양한 미국인 양아버지가 판사직을 은퇴한 후 은행장이 되었을 때, 갓 이민 온 유 목사를 은행에 취업시켜 주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부모를 여의고 뿔뿔이 흩어진 이 가족에 늘 도움의 손길을 내미셨다. 성실한 유 목사는 곧 은행 지점장이 될 길이 열렸으나, 목회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미국인 회중인 배숀 연합감리교회(Vashon UMC)에 파송 받아 성공적인 미국인 교회 목회를 하였고, 타코마(Tacoma)에서 미국인 교회를 섬길 때, 한인 이민자들의 요청으로 타코마(Tacoma)한인연합감리교회를 창립하여 부흥 성장시켰다.
그 후, 미연합감리교회 출판부 편집 직원으로 발탁되어 한국어교재 편집 총책을 맡았고 <제자화를 위한 성경공부> 교재를 번역 출판하여, 한국과 미국의 교회에 그룹 성경공부 교재를 배포하는 일을 도왔다.
미주 본토 최초의 한인 교회인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에서 11년간 목회하는 동안, 숙원 사업인 성전을 이전 확장시켰고, 한흑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한흑연합예배를 주도하여 인종을 초월한 기독교인의 화합을 도모했다.
캘리포니아 연회의 네다바 시에라 지방감리사로 임명받아 연회와 지역교회를 오가며 화해와 중재의 사역을 감당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54년 후인 2024년, 남과 북, 독일과 미국으로 흩어졌던 형제 누이들은 감격의 상봉을 한다. 미국에 사는 동생들이 북한에 사는 두 누이와 그들의 자손을 세 차례 방문해 이념과 갈등을 초월한 혈연 간의 사랑과 연민을 나누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유 목사는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를 13년간 극진히 보살피다 하나님 나라로 보낸 아픔을 간직한 채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며 관조하는 여유를 갖고, “하나님의 온기가 흐르는, 손이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갖고 여생을 보내고 있다.
아버지를 공산당 손에 잃고 어머니는 식중독 사고로 잃어 고아가 된 칠 남매 중 장남인 유석종 목사는 어딜 가나 희생과 사랑의 모범을 보이며,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인화를 이루는 어른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 존경받는 선배 목사의 이야기를 읽게 되어 감사하다.
유 목사의 책 <무너진 울타리 다시 세우다: 나의 가족 이야기>는 <Rebuilding the Fallen Fence: A Korean Family>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아마존에서 종이책은 $17.95, 전자책은 $9.99에 구입할 수 있다. 또 한국어판은 유 목사에게 [email protected]으로 이메일을 보내 주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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