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글은 아시안 유산의 달인 5월을 기념하여, 정희수 감독이 <바라부행동연대(The Baraboo Acts Coalition)>가 주최한 “반아시안 인종차별 및 외국인 혐오(Uncovering Anti-Asian Racism and Xenophobia)”를 주제로 발표한 내용을 편집해 3회에 걸쳐 재게시한다. 이번 글은 그 첫번째 순서로, 당시 정 감독은 위스컨신 연회를 이끌고 있었다.)
2025년 4월 24일, 서울 꽃재교회에서 열린 서울 연회 본회의에서 정희수 감독이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에 대해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오늘 저녁, 저를 <반아시안 인종차별 및 외국인 혐오(Uncovering Anti-Asian Racism and Xenophobia)>를 주제로 한 바라부 토론회의 주 강사로 초대해 주신 <바라부행동연대(The Baraboo Acts Coalition)>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제 개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 주제로 말씀드릴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바라기를, 이 시간이 단지 반아시안 인종차별 및 외국인 혐오의 문제만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사려 깊고 돌봄과 환대가 있는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행동 지침을 함께 모색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애석하게도 미국의 역사 속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소수민족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처럼, 미국 내 반아시안 인종차별의 역사 역시 건국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19세기에 중국인 노동자들은 광산과 벌목 캠프, 그리고 대륙횡단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머물던 거주지는 열악한 의식주 환경과 비위생적인 상태로 인해 감염병이 확산될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부상을 당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고, 질병의 만연으로 여성과 어린이들의 사망률 또한 매우 높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20세기에 발발한 전쟁은 반아시안 인종차별과 박해를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습니다. 진주만 공격 이후인 1942년부터 1945년까지 12만 명이 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극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 수감되어 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은 삶의 터전과 재산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연합감리교회 위스콘신 연회에서는 매년 인종 정의와 화해를 위해 헌신하는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에게 페리 사이토(Perry Saito) 목사의 이름을 딴 시상식을 합니다. 페리 사이토는 비폭력과 생명 존중의 가치를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그의 기독교 신앙과 평화와 정의에 대한 헌신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캘리포니아의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경험 속에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는 화해친목회(Fellowship of Reconciliation)의 설립을 돕고, 평화와 빈곤, 인권과 관련된 정의와 화해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그는 인종 정의를 위해 싸우는 동시에 위스콘신주의 여러 교회를 섬겼습니다.
일본계 미국인들뿐 아니라 아시아인 전체를 향한 폭력은 1940년대부터 1950년 초반까지 계속 증가했으며,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우는 린치(lynch)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미국이 한국과 남베트남을 지원했던 시기에도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공격과 폭력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기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러한 차별과 폭력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시아계를 향한 공격과 혐오의 상당 부분은 세계화와 함께 확산된 사스(SARS), 조류독감, 코로나19 등과 같은 질병 및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더 심화되었습니다.
반아시안 인종차별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는 아시아인이라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무지와 왜곡된 이해입니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화는 고대 중동에서 사용되던 오리엔탈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채택한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기준으로 방향을 이해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기 때문에, 오리엔탈은 단순히 그들의 동쪽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황화(黃禍)"와 같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고정관념은 서로 다른 동양의 민족과 문화를 하나의 모호한 집단으로 뭉뚱그려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흑인 민족과 문화, 히스패닉∙라틴 민족과 문화 및 미국 토착 원주민들과 문화를 향해서도 복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 언어와 민족의 구성원들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인종이나 민족 또는 문화를 다른 집단보다 더 억압하거나 희생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이든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며, 그 자리는 정의롭고 포용적인 사랑의 공동체와 인종적 수용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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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바로 무지입니다. 우리가 무지 속에 머무는 한, 긍정적인 변화를 향한 동기 역시 생겨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 대해 배우고, 다른 사람들의 관습과 신념을 이해하며, 타인을 구체적이고 가치 있는 한 사람으로 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동정과 공감, 배려를 키워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공동체가 품는 경계 역시 더욱 넓어질 수 있습니다.
외국인을 향한 혐오는 결국 우리와 다르거나 낯설고 이국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며,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관계를 맺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힌두교 경전인 베다에는 어두운 방으로 들어간 한 남자에 대한 우화가 나옵니다. 그는 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같은 것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공격하려는 독사라고 생각한 그는 겁에 질렸지만,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채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확인해 보니 그것은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지 말려 있는 밧줄에 불과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계몽의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세상에 관한 참된 지식은 세상을 덜 두렵고, 우리를 더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협이 대상이 아니라 잠재적인 축복의 원천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더 여유롭고, 안전하며,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다양한 자극과 상황을 보다 신중하고 관대하게 받아들이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더욱 명확하고 건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함께 살아가는 경험은 진정한 이해를 함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며,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울타리가 존재하는 곳에는 그 울타리 밖에 있는 그들도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속한 “우리”의 울타리를 끊임없이 넓혀 가며, 결국 “그들”이 “우리”가 되고 모두가 함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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