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중에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아주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새찬송가 214장) 라는 찬송이 있다. 얼마나 은혜로운 찬송인가? 내가 무너진 마음으로 주님께로 갈 때 주님은 어떤 자격요건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기독교 복음의 기본 메시지인 것이다. 282장 “큰 죄에 빠진 날 위해”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엘리옷(Charlotte Elliott)이 자신의 회심의 경험을 노래한 것인데, 그녀가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란(Malan) 목사님께 물었을 때 대답이 “Just come to Him as you are”(현재 당신의 모습 그대로 오시면 됩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자격 따질 것 없이 현재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주님께로 오기만 하면 주님이 다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신다는 은혜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찬송이기에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부흥사로 알려진 빌리그래함 목사가 이 찬송을 통해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자격 요건을 따진다. “우리 그룹에 들어오려면 수입이 얼마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너는 안 돼.” “우리 회사에 들어오려면 평가점수가 80점은 넘어야 해.” “나하고 상대하고 싶으면 이거 이거 고치고 와.” 이런 식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은 어떤가? 재정상태가 엉망이어도 시험점수가 한참 미달이어도 실수가 많고 흠이 많더라도 현재 그 상태대로 하나님께 오면 하나님이 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 가는 데에는 그런 세상적인 자격요건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말씀이다.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그런데 이 “내 모습 이대로”의 의미가 정말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하나님이 다 받아주신다는 의미일까? 자신의 현재 상태에 별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죄로 인정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즉 전혀 고칠 의향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이 그대로 다 받아주신다는 의미일까?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못마땅해 하는 주요 이유가 기독교인은 위선적(hypocritical) 혹은 비판적(judgmental)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본받지 못하고 “내 모습 이대로”의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같이 겉과 속이 다르고, 자기도 지키지 못할 율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잘못을 분명히 현대 기독교인들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이 “내 모습 이대로”의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성경에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내 모습 이대로”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조건적”으로 죄까지도 인정해준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보통 우리가 금언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그 죄 지은 것에 대해서 처벌을 하면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을 영원히 “죄인”으로 규정하여 옭아매지는 말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죄인은 받아주시지만 죄는 받아주시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죄를 짓고 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하나님은 무조건 받아주시고 다시 한 번 그에게 희망을 걸고 믿어주신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그를 “무조건” 받아주시는 법은 없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이 받아주셨는데 그 간음죄까지 받아주셨는가? 아니다. 다시는 간음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받아주셨다. 또 예수님은 옆에서 십자가형을 받는 강도를 천국으로 받아주셨는데 절대 그 사람의 죄를 받아주신 것이 아니다. 그 강도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그 회개의 마음을 보시고 그를 천국으로 받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내 모습 이대로”는 “무조건”의 의미가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태도를 전제로 하는 은혜의 메시지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