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

지란지교는 말뜻 그대로 지초와 난초의 사귐이라는 의미입니다. 향기로운 지란처럼 맑고 깨끗한 우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명심보감(明心寶鑑)》〈교우(交友)〉편을 보면, "선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마치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與善人居 如入芝蘭之室)는 표현이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악취가 진동하나, 그마저도 오래 있으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니 친구를 잘 선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를 오래전 여류시인인 유안진이 한 편의 시로 만들어 발표한 바 있습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란 제목의 시인데, 그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조금 나더래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 유안진 -

여러분은 이런 친구를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자신에게 한없이 편한 친구는 어쩌면 매우 일방향적인 관계처럼 비추어질지 모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 쳐주고 나서, 나중에 시간이 흘러 평온해질 때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는 그런 선한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무조건 덮는 것이 아니라 지적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죠. 이런 친구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요? 시인도 말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건 많은 사람과 사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한 두 사람과 정말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지속되길 바랄 뿐이라는 겁니다. 매우 소박하면서도 현실적인 바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 요즘 우리의 모습은 마치 스스로가 스타병에 걸린 사람처럼 타인을 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특히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다수와 소통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심리적 성향은 강화되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의 소소한 심리상태나 행동 하나하나도 인터넷에 올려 다른 사람이 공유해 주길 바라고, 자신도 수많은 인터넷상의 친구들을 만들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데 익숙합니다. 은연중에 많은 사람들이 스타처럼 만인의 연인이 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나눌 수 있다면 그만큼 이상적인 모습도 없습니다. 하지만 대개는 실제로는 현실화되기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만인을 사랑하는 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어떤 편이 가능한 일일까요? 오히려 속마음은 만인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편이 더 솔직한 표현이 아닐까요? 사실은 사랑을 전적으로 자기중심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만인의 연인이 되려는 사람보다 내게 솔직할 수 있는 진정한 연인을 갖고 싶은 것이 모두의 솔직한 마음 아닐까요? 연예인들이 자신의 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연인이 말하는 사랑과 그 진정성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너무 흔하고 대상도 불분명해서 가슴에 와 닿지도 않는 영혼 없는 단어가 된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스스로 이 질문을 되뇌이곤 합니다. “과연 나는 성도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사랑하는 성도는 누구이며, 교회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정말 한 영혼을 향한 진지한 관심과 사랑으로 기도하고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는가? 나의 자존심과 명예, 그리고 출세를 위하여 사랑이라는 말조차 값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재난과 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진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도움의 손길을 보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이러한 재난과 전쟁의 피해를 생각하며 함께 애통하고 긍휼한 마음이 진정 느껴지시나요? 마치 내가 겪는 것처럼 아니면 내 가까운 사람의 고통으로 함께 아픔을 느끼고 계시나요? 여러분의 감정을 지금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여러분이 믿고 있던 사랑의 적합한 정의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답을 구하다 보면, 적어도 만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될 겁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게 느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여기서부터 사랑이 출발된다는 점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무겁게 느낄 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의 연인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건네기 위해 수백 번 되 삼켜야 했던 사랑의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의 그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낯선 이방인과 멀리 떨어져 일면도 없는 익명의 사람에게 그들을 생각하며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의 무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무거움이 실로 느껴질 때 사실은 사랑이 막 시작되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사랑은 실로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를 짊어진 사랑 아닙니까? 자신의 목숨을 건 사랑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신실한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친구가 되어 달라는 일종의 초대 말씀입니다. 종처럼 억지로 누구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랑이라 말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신 신실한 사랑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진실된 사랑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나는 지란지교와 같은 친구가 되어주라는 권면입니다. 허물없이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래서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영혼 없는 관계가 아니라 매우 소박하면서도 현실 가능한 친구가 되어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란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라 친구에게 무게 중심을 옮겨놓는 행위입니다. 내가 되받기 위하여 혹은 내가 만족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위해 자기중심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큰 사랑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비로소 지란지교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열린교회, CA
올린날: 2016년 6월 8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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