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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여행에서 만난 여러 도시 중 가장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는 타오르미나(Taormina)였다. 해안선이 아름다운 선율처럼 펼쳐지고, 그 해안선을 바라보는 산 중턱에 집들이 층층이 조성되어 있다. 구불구불 돌아 높은 지대로 올라갈수록 변화하는 전망이 신비롭다. 그렇게 오른 해안 절벽 위에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이 그 위엄을 뽐내며 자리 잡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고색창연한 화강암 기둥, 역사의 흔적을 품은 집들과 짙푸른 바다가 시선에 담기고, 멀리 남서쪽으로는 아직도 꿈틀대고 있는 에트나산 정상에서 화산의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 원형극장 안에 오래 앉아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하다.
이렇게 쾌청한 날씨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하는 뉴 잉글랜드, 그중에서도 가장 북쪽 변방에서 지낸 오랜 시간에 대한 보상처럼 남국의 따사로운 햇볕은 온몸과 마음 구석구석 스며든다. 행복감과 감사가 넘쳐나는 순간이었다.
그곳에 앉아서 상상해보았다. 이 극장에서는 도대체 어떤 공연이 펼쳐졌을까? 검투사와 사나운 사자의 싸움이었을까, 아니면 그리스 비극 공연이었을까? 왕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어떻게 2천 년의 세월 동안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시칠리아가 전 세계로부터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이유는 비단 날씨와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로마 시대의 유적들, 많은 박물관과 교회가 찬란했던 옛 시절을 조용히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숱한 유적과 보물을 보면서 나는 시칠리아의 문화를 한마디로 요약해보았다. '다양함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공동체의 모범 사례’. 시칠리아의 그리스 폴리스들은 로마제국에 멸망했고, 로마에 이어 아랍 세력이, 그 후 노르만족이, 이어 스페인이 시칠리아를 지배했다. 지중해의 상업, 무역 주요 거점인 탓에 수천 년간 숱한 외부 세력의 지배 아래 여러 인종과 문화가 뒤섞인 시칠리아는 자연스럽게 공존의 가치를 터득한 게 아닐까.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다양한 시대의 여러 종교 건축물과 예술 작품이 한 공간 안에 조화롭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동부의 시라쿠사 대성당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성당의 외부는 바로크 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듯, 화려한 장식과 동상이 서 있다.
교회당에 들어서면 정문의 두 기둥과 교회 외벽 기둥은 고대 그리스 신전 기둥이지만, 내부 기둥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본당 오른쪽의 작은 기도실은 바로크 시대의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정면 제단에 매달린 십자가에 그려진 예수의 성상은 비잔틴 모자이크이다. 제단의 촛대와 공중에 매달린 등도 비잔틴풍 예술품이다.
대표적인 예가 하나 더 있다. 팔레르모 근교에 있는 몬레알레의 대성당이다. 성당 정면에 모자이크로 된 예수 그리스도가 눈을 크게 뜨고 방문자들을 응시하고 있지만, 교회 전체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아랍적 색채가 강렬하다. 교회 건물의 한 회랑은 아랍 그 자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특색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다. 놀라운 발상이다. 어떻게 기독교와 이슬람의 예술이 어우러진 예배당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결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시라쿠사와 몬레알레 두 성당은, 시칠리아인들이 공생의 가치를 배워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이 아닐까 나름 추론해보았다. 자료를 찾아보니 역사적 근거도 충분하다.
사라센에 점령당한 878년부터 1072년까지 시칠리아는 이슬람-아랍의 지배를 받았다. 1072년부터 1266년까지는 중세 독일과 신성로마제국의 유력 가문으로 노르만과 독일계인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기간 동안 이슬람과 기독교의 공생이 지속되었다. 노르만 왕조의 왕이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인 프리드리히 2세(1198~1250) 덕분이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슬람교도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강요하지도, 이슬람 건축물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세 십자군 전쟁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두보 역할을 했던 시칠리아가 두 적대적인 종교를 모두 수용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1세기부터 시칠리아가 점차로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상선이 드나들었고, 시민들이 부과된 세금만 내면 이슬람교도이든 기독교도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통치자들의 “열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1 이때부터 시칠리아인들은 공생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 틀림없다.
여러 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온 경험 덕분에 이들은 -그리스인, 로마인, 아랍인, 프랑크인, 스페인인, 북아프리카인- 각자의 고유한 문화, 종교, 전통을 지키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모두가 고통받게 되니까···. 한마디로 그들만의 ‘모자이크식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시칠리아의 ‘모자이크식 문화’를 보면서 우리의 삶의 터전인 미국을 생각해본다.
현대의 미국 사회는 멜팅폿인가, 아니면 모자이크식 문화인가? 미국은 과연 공생의 가치를 존중하며, 시민들은 그 미덕을 구체화하고 있는가? 나의 대답은 ‘글쎄!’다.
* * *
시칠리아 여행 중 생각하게 된 또 다른 하나의 주제는 ‘질서 속의 무질서, 무질서 속의 질서’다.
첫 며칠 동안, 수도인 팔레르모 중심가를 운전하면서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도로에 중앙선이 없다. 회차로에서의 원칙은 미국과 동일한데 현지인들은 마구 밀고 들어온다. 이방인 운전자는 원칙과 유연성 사이에 끼여 오도가도 못한다. 시칠리아인들은 법보다 관습(혹은 유연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어딘가 불안한데 잘 굴러가는 차량 같달까?
'만약 사고가 난다면 어떻게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할까?’ 미국인다운 걱정이 끝이 없다.
하지만 열흘의 체류 동안 접촉 사고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 안에 있는 ‘불안’을 분석해보니, 철저히 법을 중요시하는 미국적 사고방식 덕분(?)이다. 시칠리아인들의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자유 왕래’는, 원칙과 유연성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단면처럼 보였다.
긴장과 걱정으로 운전하는 며칠 동안 동행했던 프랑스 친구가 흥미로운 화두를 던졌다. 이탈리아야말로 진정한 'l’Art de Vivre(The Art of Life)’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라고. 멋진 표현인데 그 의미는 꽤나 심오해서 한참 동안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뜻인가? ‘인생은 예술이다’, 삶은 과학이라기보다 오히려 예술과 가깝다.
법과 원칙보다 타인에 대한 존중, 자유, 관대함이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근본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수천 년의 역사 동안 프랑코 민족으로 살아온 프랑스인에게는 ‘관용'이 중요하지만, 여러 민족의 이민자들로 건설된 200년 역사의 미국은 ‘법'이 우선시되어야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겠는가? 프랑스인과 미국인의 사고방식이 확연히 다름을 체감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에피소드가 하나 생겼다. 고대 그리스 신전들로 유명한 아그리젠토(Agrigento)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인터넷으로 예약한 개인 숙소를 어렵게 찾아갔는데 방이 실망스러웠다. 햇볕이 안 드는 어두운 뒤쪽 방이었고 무엇보다 담배 냄새가 심했다. 침대도 한 개였고 공간도 너무 비좁았다(역시 미국적인 기준에서!).
주인에게 불평하는 문자를 보냈다. 냄새가 심하니 다른 방으로 바꿔줄 없겠느냐고. 주인이 빠른 답장을 보내왔다. 미안하다고, 방에서 냄새나는 것을 몰랐다고. 그렇지만 그날 밤은 방을 바꿔주기는 어렵다고(예약이 다 찬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에 체크인하지 않은 것으로 인터넷에서 방을 취소하면 예약 가격의 반을 환불해주겠노라고.
저녁 식사 중에 친구에게 주인의 답장에 대해서 언급했다. 친구가 말한다. “주인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 아니므로 취소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내가 방값의 반을 지불하면 어때?”라고. 그러고는 덧붙인다. “형규, 삶은 예술 같은 거야!”
마지막 문장이 내 머리를 탁 친다.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원칙을 내세운 나와 달리, 친구는 상대방의 입장과 배려를 더 우선시한 것이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서, 존중과 관용(불어로 톨레랑스)의 정신이 어떻게 일상에 구체적으로 적용 가능한지 인식하게 되었고, ‘삶은 예술 같은 것’이라는 의식과 실천을 통해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음을 새삼 자각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미국이 얼마나 소송, 재판으로 얼룩진 나라인지. 미국인이 좋아하는 ‘법’에 이 귀중한 가치 ‘The Art of Life’가 더해지면 얼마나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까 혼자 잠시 꿈꿔본다.
되돌아보니, 열흘 동안 한 번도 경찰차나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시칠리아는 처음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파리나 로마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소매치기 걱정도 줄어들었고 긴장의 끈도 느슨해졌다. 마피아들도 여행객은 건들지 않는다는 소문 덕분이 아니다. 시칠리아인에 배어 있는 오랜 지혜와 미덕 때문이었을 것이다.
* * *
누군가의 명언이 떠오른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다!’ 왠지 시칠리아에서는 독서와 여행이 일치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시칠리아 전도사가 되었다.
귀 얇은 당신이 시칠리아 방문을 계획한다면 나는 다음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영화 <시네마 천국>의 배경이 된 마을 ‘Palazzo Adriano’라는 도시를 방문해보면 어떨까? 오가는 길목의 풍경이 장관이고 친절한 박물관 안내원이 당신을 아주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만약 운이 좋다면, 마을 시장이 당신과 사진 한 장 찍어줄지도 모른다. 영화 속 한 소년이 바로 그 시장이니까.
만약 당신이 한국 음식 찐팬(!)이라면, 컵라면을 꼭 챙겨갈 일이다. K-food의 효자, 국물 한 사발이 기름기 많은 시칠리아 음식의 잔재를 깔끔하게 씻어줄 테니까.
아, 다시 시칠리아가 그립다. 수천 년의 문화와 문명이 숨 쉬는 곳, 공생과 공존의 가치가 배어 있는 곳, 삶의 예술이 적용되는 그곳에서 나는 또 독서와 여행을 동시에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주) 1. 시오노 나나미,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상권. 175~19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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