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저는 그동안 한 번도 평화위원회에서 여는 모임에 참석해본 적이 없습니다.

‘평화’라는 주제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와 목회를 오가는 저의 삶의 우선순위로 생각해본 적이 없던 탓이지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한 번도 참석해본 적이 없는 평화위원회 모임이 마치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처럼 ‘가지 않는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언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핑계 대며 하지 않는 기분처럼 말입니다. 괜스레 혼자, 빚진 사람처럼 미안해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평화를 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로서, 평화를 위해 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것이었나 봅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있는 곳과 가까운 일리노이주 샴버그의 살렘교회에서 평화위원회가 평화 학교를 한다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학교’라는 단어 덕에 저같이 관심은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평화를 고민하고 일한 분들이 여는 ‘학교’에서 ‘평화’에 대해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데, 그런 나라에서 온 이들이 고민하며 노래하는 평화는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3일이라는 짧은 세미나였지만, 제가 참석한 세미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세미나였습니다.

평생목회 세미나, 교회성장 세미나 등 여러 종류의 세미나를 참석했지만, 이 짧은 세미나가 ‘최고였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2019년 11월 4-6일 일리노이주 샴버그 살렘교회에서 열린 2019년 평화학교의 강사인 메노나이트 교단의 허현 목사가 평화학교에서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강의하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2019년 11월 4-6일 일리노이주 샴버그 살렘교회에서 열린 2019년 평화학교의 강사인 메노나이트 교단의 허현 목사가 평화학교에서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강의하고 있다. 사진 김응선 목사, 연합감리교뉴스.

하루의 시작을 열어주는 예배의 말씀, 첫날 저녁 장위현 목사님의 나눔의 시간과 LA에 위치한  화해센터(reconciliAsian) 대표인 허현 목사님의 평화 강의는 하나도 놓치지 말고 배우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가슴을 치며 크게 울렸습니다. 

하나도 뺄 수 없는 귀한 이야기의 연속이라 강의 내내 아주 바쁘게 타이프하며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강의 내내 가득했던 평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보다 더 깊은 평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진심을 담은 헌신 등, 그 어느 것 하나 마음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평화가 무엇일까요?

제가 섬기는 교회는 미국인 영어 회중입니다.

문화적, 인종적, 경제적, 어느 것 할 것 없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흑인도, 백인도, 아시안도, 남미계도 이곳을 교회라 부르고, 홈리스에서부터 아주 잘 나가는 사업가까지 모두 모여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예배를 드립니다. 심지어 간혹 그리스도인이 아닌, 유대인이나 타 종교를 믿는 분들도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독특한 교회이기도 합니다.

주일 아침이면 교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는 교인들, 낯선 교인들 혹은 방문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며, 포옹하고 예배를 시작합니다. 간혹 간단하게 굿모닝! 하고 인사하는 교인도 계시지만, 저는 굿모닝보다 “Peace be with you!”라고 인사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의 삶에 단비같이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삶의 배경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장면은 주일 예배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믿는 바가 다르고 살아온 이야기는 다르지만, 서로의 안녕을 비는 그 시간이 제 생각엔 예수님도 좋아하시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를 들으면서, ‘내가 과연 평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의 삶에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틀린 마음은 아니지만, 내가 바란 그 평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평화보다 조금은 더 좁고, 얕은 평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살짝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허현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 ‘샬롬’은 원어 그대로의 뜻으로 읽으면, ‘Peace’보다는 Peace with Justice(정의와 함께하는 평화) 또는 Peace and Justice(평화와 정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던 그 ‘평화’, 심지어 다시 살아나신 후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하셨던 처음 말씀, “평화(평강)가 너희와 함께할지어다!”의 그 ‘평화’의 진정한 의미가 그저 평안한 영혼의 상태, 혹은 마음이 진정된 상태가 아닌 ‘정의’가 동반된 단어일 줄이야. 마치 뒤통수를 망치로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평화는 얼마나 ‘정의’와 동행하고 있을까요?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를 살고 있을까요?

다른 분들의 대답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저 자신을 되돌아본 후 제 대답은 정말 부끄럽게도 “아니오.”입니다. ‘샬롬’의 의미조차 여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가, 예수님이 직접 사셨고,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샬롬’대로 살았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습니다. ‘혹시 나는 여태 삯꾼 목자처럼 교인과 교회에 아주 좁고 얕은 이해의 복음만 전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 예수 믿으면 잘되는 것이 평화라고 떠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 나 정말 삯꾼 목자였나 보다...’ 서늘함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창과 칼로 선언한 기독교 국가의 모습이 하나님의 평화를 이룬 것이었을까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자신의 휘하에 있던 모든 군대장과 군인들을 모아 한 번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화려한 로마 갑옷과 망토를 입고 군장을 갖추고 말 위에 오른 채, 세례를 받기 위해 차례로 강에 들어갔는데, 칼은 물에 젖으면 안 되어서 머리 위로 높이 든 채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살기 위해 결단하며 세례를 받는 중에 남을 찌르기 위한 날카로운 무기를 머리 위에 들고 있다니, 그것이 예수님이 원한 세례 받은 자의 삶의 모습이었을까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새하얀 털을 가진 어린양과 같지 않으셨을까요?

사진 영국 하이랜즈 칼리지의 스테인드글라스 (Stained-glass windows in Jersey Highlands College, Jersey, UK.)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tained_glass_Highlands_Jersey_2013_5.jpg 영국 하이랜즈 칼리지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진, 맨 뷔, 위키피디아 커먼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어린양이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보좌에서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런데 위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 어린양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창과 칼이 아닌 그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를 쏟으신 예수님이 지금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그가 세상에 우리와 함께 지내실 때처럼 ‘자기희생’입니다. ‘자기희생’으로 다스리는 세상! 이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을 보는데 심장이 덜컹했습니다.

‘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계시는구나.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 또한 우리를 희생해 남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평화는 예수님을 닮고 싶어 하는 우리의 ‘자기희생’ 없이는 오지 않겠구나. 난 예수님을 20년 가까이 믿어 왔는데, 대체 지금껏 뭐 하고 살았나.’ 덜컹하는 소리는 깨달음과 함께 오는 자괴감에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우리가 희생해 남을 높일 때 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정의롭게 행하고, 자기희생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이번 세미나를 통해 배웠습니다.

통일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세미나겠거니 했는데, 통일을 아우르는 주제인 ‘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모임이었습니다. 통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아주 작은 그늘까지도 예수님의 평화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의 ‘틈’에서 일한다고 합니다.

사탄은 사랑이 깨지고 신뢰가 깨지면서 생기는 그 작은 ‘틈’을 더욱 벌리고 깊게 만들어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약하게 한다고 합니다. 허현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할 일은 그 ‘틈’들을 메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와! 또 한 번 머리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그 틈을 메우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틈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 이 세계에도, 제가 지금 섬기는 교회에도 ‘틈’은 존재합니다.

아마도 글을 읽는 분들이 섬기는 교회나 공동체에도 ‘틈’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처럼 살고 싶은 사람으로서, 물론 멀리 선교를 떠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떠나지 않아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그 ‘틈’을 메우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꽃이 필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그 틈을 메우고, 좋은 거름을 주고, 사랑으로 돌보면, 그 틈은 더는 사탄이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위험한 공간이 아닌, 예쁜 꽃이 피어나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새로운 희망이 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어로 읽으면 ‘화평케 하는 자’는 peacemaker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평화를 만드는 자들은 “the children of God,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이 세상의 평화를 만드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닐까요? 특별한 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닌,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세상에 평화, 그것도 정의가 동반하는 그 적극적인 평화를 만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 않을까요?

이번 세미나를 통해 저는 더욱 적극적으로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동안 이민 문제나 다른 사회 정의 문제에 대해 참 소극적으로 대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과 세계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는데, 나 자신의 구원과 영혼의 평안함만 좇을 것이 아니라, 저는 그 부르시는 그 부르심을 좇아야 하는 사람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번 세미나를 통해 느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샬롬, peace with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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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혜원 목사는 북일리노이연회 소속으로 시카고 템플 제일연합감리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615-742-5470 또는 [email protected]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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