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여러분 반갑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이, 오늘, 이 아침 예배에 오신 모든 분께,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저는 어제 ‘조상신’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해서, 크진 않지만 아주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던 이상현 목사고요, 지난 6월까지만 해도, 북가주 연회의 캘리포니아 몬트레이에 있는 가나안 연합감리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몬트레이는, 아마 골프하시는 분들에겐 US Open 열리는 페블비치(Pebble Beach)가 있는 곳이라고 하면 잘 아시더라고요. 그곳은 휴양지 교회답게, 제가 6년을 섬기면서, 한 번도 새벽기도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말씀 준비하는 수고가 없었는데요. 지난 7월부터, 산호세 쪽에 있는 베델 한인연합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으면서, 7월, 8월, 9월, 지난 석 달 동안,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안 하다 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 와중에 여기서 한인총회를 한다고 하니까, 아, 그럼 오랜만에 새벽기도를 (좀) 빼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여기 오겠다고 신청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아침 설교를 맡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늘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15년 전만 해도 동부 볼티모어에 있는 어느 허름한 가게에서 매니저로 있었습니다. 제가 볼티모어에서 5년 있었는데요. 그 5년 동안의 볼티모어 생활을 통해서, 저에게 남은 건 딱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볼티모어 레이븐스입니다. 지금도 저는 풋볼 경기를 보면 레이븐스 경기를 봅니다. (Go Ravens!)
둘째는, 한 가지 트라우마입니다.
볼티모어라는 지역을 아시겠지만, 저희 가게에 오는 커스토머의 95%가, 아프리칸 어메리칸이라고 불리는 흑인들이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하루에 열 번 이상, ‘항의’하는 흑인 손님들하고, 똑같이 소리 지르고, 똑같이 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웬 일로 항의하는 손님도 없고, 나름 한가한 날이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쾅! 쾅!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은 다 아는 소리죠? 바로 두 방의 총소리였습니다. 동시에 밖에서 막 사람들 비명 같은 게 들렸습니다. 전 지체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보게 되었습니다.
한 흑인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것도, 평소에 저희 가게에도 가끔 들리며, 그 앞에서 할 일 없이, 맨날 배회했었기 때문에, 제 눈에도 낯이 익은 그 흑인 친구가, 어느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습니다.
전, 한눈에, 그 흑인이, 총에 맞아 즉사했다는 걸 알아봤습니다. 그담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인 경찰이 흑인을 총으로 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이슈가 될 만했지만, 신문 기사의 내용은 제가 본 것과 달랐고, 그 일은 그냥 그렇게 조용히 묻혔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총소리와 함께, 그 흑인이 총에 맞아 바닥에 쓰러진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그러고 얼마 후에, 저는 늘 하던 대로, 불만을 제기하던 어느 흑인과 말싸움이 붙었는데요, 저는 그 사람에게 당장 가게를 나가라고 했고, 그 흑인도 화가 났는지, 저에게 “네 나라로 꺼져버려… Go Home, Go back to your country…” 하면서 F 단어와 S 단어를 남발하더니 그담에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상하게, 영어는 평소에 잘 안 들리는데, 그런 말은 꼭 잘 들립니다.
“내가 집에 지금 총이 한 자루 있는데, 지금 집에 가서 그 총을 가져와서, 너를 쏠 거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 시간이 저녁 5시쯤이었는데, 가게는 10시 반에나 문을 닫거든요. 그 후 5시간 반 동안, 저는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가게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혹시 아까 그 총 가지러 가겠다는 놈인가 싶어서, 계속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 얼굴만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계속, 얼마 전에 총에 맞아 쓰러졌던 그 흑인의 모습이 떠오르며, 그게 난가 하는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그날은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아무 일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후, 꽤 오랫동안, 가게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혹시 그때 그놈이 총 들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흑인이 총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나오면, 그날 생각이 납니다. 총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겁니다.
이와 같이, 과거에 겪었던 어떤 충격이나, 끔찍한 일로 인해서, 그 이후로 계속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고통이 남아 있는 현상을, ‘트라우마’라고 부릅니다.
가령, 어렸을 때 높은 데서 떨어졌다가 크게 다쳐 본 사람은, 고소공포증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죠.
어릴 때 물에 빠져서 죽을 뻔한 경험을 했던 사람은, 그 때 그 일에 대한 기억이 머리론 없어도, 몸은 그 트라우마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물가에 가지 못하게 되죠.
또, 사람과의 경험도 트라우마가 되곤 합니다.
너무 어렸을 때, 좀 질이 나쁜 남자를 사귀었다가, 상처를 겪어본 여성은, 그다음부턴, 다른 남성도 잘, 믿지 않게 되죠. 남성에게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선천적인 장애나, 알러지 같은 거랑은 달리, 살면서 겪게 되는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생겨나는데요, 제가 이 단어를 처음 들은 게, 30년 전에, 대학 다닐 때, 심리학 수업을 들었을 땐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단어가 그렇게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진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방송이나 일상에서, 이 트라우마, 혹은, 이게 질환의 형태로 발전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곤 합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서도, 어떤 형태든 ‘트라우마’ 혹은 PTSD를 안고 사시는 분들이 꽤 되실 겁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상처 한번 없이 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무리 목사님의 얼굴로, 늘 보살 같은 미소를 짓고 사시면서, 얼굴에 구김살 하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정말 다신 반복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상처를 품고 있다는 말씀이죠.
아마, 여러분들 모두, 크든 작든, 여러 가지 트라우마를 안고 사실 겁니다. 특히, 우리 목회자들은, 목회를 통해서, 정말 다양한 트라우마가 생깁니다.
어떤 분들은, 영어 트라우마가 있을 겁니다. 설교하고 났는데, “너 액센트를 못 알아듣겠다.”라는 말도 수없이 들어보셨을 테고요.
또 어떤 분들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트라우마를 받으신 분도 계실 겁니다.
제 경우엔, 작은 교회를 섬기는 중에, 정말 몇 명 교인도 없는데, 어느 교인 하나가, 요새 느낌이 ‘쎄’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열심히 하던 교인이었는데, 요새 친교 참석도 잘 안 하고, 예배 끝나면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곧장 집에 가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그 교인에게 카톡이 옵니다.
“목사님, 잠깐 전화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혹은 “목사님, 잠깐 만나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럴 땐, 정말로, 제 심장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납니다. 진짜로 심장이 조여오는 거 같고, 뱃속이 뒤틀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전화통활해 보면, 혹은, 만나서 얘길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 교회, 잠깐 좀 쉬고 싶어요.”
그담부터, 내용은 각양각색이지만, 이미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저한테 통보하는 거니, 제 입장에선 어떻게 말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떻게든, 좋게 좋게 대활 나누고 헤어지지만 이미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분이 다시, 예전의 신앙생활로 돌아오기까지, 앞으로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는 걸요.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박힌 제 마음속의 트라우마는, 그보다 더 오래 남아있을 거라는 것도 말이죠.
이런 얘기, 저만 겪어본 얘기는 아닐 겁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이야기기도 하겠죠.
이처럼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에게 박힌 그 깊은 상처로 인해, 엄청나게 고생을 하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거꾸로 자기 몸에 새겨져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자랑스럽게 여기곤 합니다.
누가 그렇게 -자기 상처를 자랑하죠?
조직 폭력배나, 갱들 보면, 자기 몸에 새겨진 칼자국이나 총에 맞은 상처를 자랑합니다. 17 대 1로 싸우다 생긴 상천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처를 대놓고 보여주는 사람은 옆에서 보면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죠?
이 조폭들 보면, 또 일부러 몸에 문신하거나, 같은 문양의 상처를 내서, 자기네가 같은 폭력 조직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연대 의식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이렇게 몸에 같은 상처를 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나온 사람들이 자기네 조직의 위엄을 과시한 사람 중에 가장 오래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인데요.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 특히, 육체에 같은 상처를 내서 그것을 자랑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누구 얘기하는 거죠? 바로 유대인들 이야깁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데, 이 율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사도 바울의 시대까지,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전통이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하고 있죠?
할례는 유대 땅을 떠나, 멀리 이방 땅에서, 이민생 활을 하면서도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율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육체에 난 상처를, 공공연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나중에, 교회에서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복음은, 처음에 유대인들 위주로 전해졌었죠?
그래서 이방인들이 이 복음을 영접하고, 교회에 들어오려고 하면, 주로 유대인들 위주로 구성되었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새로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받기 전에, 할례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이런 이들의 주장에 대해, 사도 바울은 뭐라고 얘기하죠?
그 대답이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은요,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태도가, 그저 자기 육체를 자랑하는 교만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고 얘길 합니다.
조폭들이 아무리 자기 몸에 있는 상처들을 자랑해도,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에겐, 그게, 그렇게까지 부러워할 자랑거리가 될 수 없죠?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그렇게 몸에 새겨진 상처가 전혀 자랑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우리가 뭘 자랑해야 하죠?
사도 바울은요, 우리에게 단 한 가지만 자랑하라고 가르칩니다. 6장 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우리가 자랑할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죠. 왜 그렇죠?
우리가 세상에서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15절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내가 할례를 했냐 안 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거죠!!!
그리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몸에 난 상처를 자랑하는 문제로, 더 이상 바울을 속 썩이지 말라는 얘기죠. 그러면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상한 말 하나를 덧붙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게 무슨 말이죠? 사도 바울이 간직한 예수님의 흔적이, 뭘 얘기하는 거죠?
이 예수님의 흔적이란 말이 사실, 참 재밌습니다.
실제로, 중세 교회 때부터 많은 신도들이, ‘내가 예수님의 상처와 똑같은 흔적을 가지고 있노라” 하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라는 게 주로, 손과 발에 있는 못 자국과, 창에 옆구리를 찔렸던 그 십자가에서의 상처들을 말하죠? 이런 흔적이, 이렇게 몸에 나타나는 현상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성흔’이라고 합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할 때 성은이 아니고요. ”거룩한 흔적”이라고 해서, ‘성흔’입니다.
이 ‘성흔’을, 희랍어로, 스티그마(Στίγμα)라고 하는데요.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말할 때 썼던 단어가 바로 ‘스티그마’입니다.
그런데, 이 스티그마라는 단어는요 원래는 좀 부정적인 의미였었죠? 옛날에 죄를 지으면, 그 죄인들의 몸이나, 특히 이마에 ‘낙인’을 찍었는데 이 낙인이 그 스티그맙니다.
이거 되게 아이러니한 단어입니다.
원래 죄인에게, 낙인을 찍을 때 사용하던 ‘스티그마’라는 말을 바울은, 오늘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표현했고요. 많은 신도가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그런 상처들을 스티그마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런 성흔들이, 진짜 몸에 나타나는 게 가능하냐? 이거 자기들이 대충 자기 몸에 새기고, 예수님 흔적이라고 둘러대는 거 아니냐? 제가 워낙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렇게 스스로 자기 몸에 새긴 사람도 꽤 많았을 거란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얘길 하려는 게 아니죠.
이 성흔이라는 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되게 상징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상처들을 경험하고 있고, 그 상처들을 우리 안에 계속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수많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고 있는 거죠. 특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하면서 겪게 되는 상처들이 있습니다. 물 공포증이나 고소 공포증처럼, 몸에 새겨진 트라우마도 있지만 우리 목회자들이 마음에 박힌 트라우마도 만만치 않죠?
우리가 목회하면서 받았던 트라우마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요, 내가 신앙생활 하면서, 내 몸에, 그리고 내 마음에 하나둘씩 생겼던 그 상처들이, 그냥 내가 고통스럽고 끝나야 했던 그런 아픔의 흔적인 줄 알았는데 이게 사실은, 예수님의 거룩한 흔적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내가 겪고 있는 수많은 트라우마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지금의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그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 한인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겪는 트라우마 중에 교회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죠? 우리 이민 사회에서는 좋든 싫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정말 애정을 갖고 열심히 다니고 있던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너무나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뭐, 이사라든지, 아님 다른 합당한 이유면 차라리 괜찮을 텐데요.
그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문제로, 특히 다른 교인과의 갈등으로, 교회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면, 당장 그다음 주일부터는 정말 깜깜해집니다. 어느 교회를 나가야 할지, 아니, 그 전에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고민 자체가, 우리 이민 사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고민인지, 여러분들 다 아실 겁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경험해 봤습니다.
지금은 목사라고, 여기 단상에서, 이러고 있지만, 그때 평신도로 있다가, 뭔 일이 생겨서, 아내와 함께 교회를 옮겼었는데, 말이 좋아서 옮기는 거지, 그다음 주부턴, 어느 교회를 갈지도 모르는 상태로, 교회를 나와 버렸습니다.
또 그런 주는 일주일이 되게 빨리 갑니다. 그리고 주일날 아침에 일어날 때의 그 무거운 마음… 아마 여기 계신 분 중에서도, 몇몇 분은, 연합감리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저랑 비슷한 경험을 해 보셨을 겁니다.
다행히도…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제가 연합감리교회를 만나게 되었고,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신앙생활을 여기 계신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할 수 있는데요. 아마, 예전에 교회로 인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다면, 전 아마 지금 제가 섬기고 있는 이런 예배를 이렇게까지 감사한 맘으로 드리고 있진 못했을 거 같습니다.
예전에, 한 교회를 떠나며 받았던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제는 지금, 제가 섬기고 있는 제 교회, 그리고 제가 속한 이 연합감리교회가 너무나 소중하고, 이 안에서 여러분들과 드리는 예배의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은혜로운 시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한때 저는 교회로 인해서, 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연합감리교회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함께 모여 드릴 수 있는 이 예배로 인해서, 지금까지 경험했던 그 모든 교회의 트라우마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거룩한 흔적인 스티그마로 바뀌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가, 지금, 저만 경험하고 있는 은혜가 아니죠?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모두가 똑같이 경험하고 계시는 동일한 은혜라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제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커다란 상처들을 교회 안에서, 특히 이 연합감리교회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간직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또다시, 우리 연합감리교회는 특히 우리 한인 교회들은 또 어떤 상처를 서로 주고받을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요, 그냥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라고 이 상처들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니죠? 우리 주님은요, 우리의 이 상처가 이 트라우마가 주님의 거룩한 흔적, 스티그마로 바뀌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순간을 준비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요,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는 그 상처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좌절하고만 있지 말고, 또다시, 내가 상처받을까 봐, 혹은 누군가에게 내가 또다시 상처를 줄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절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 다시 일어나서, 우리의 이 상처들이, 주님의 성흔으로 주님의 은혜로 바뀌는 그 변화의 순간을,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맞이해야 할 때라는 겁니다.
앞으로 우리 연합감리교회가, 얼마나 더 큰 상처를 입고, 얼마나 더 큰 트라우마를 갖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 상처들이, 주님이 우리와 언제까지나 함께하신다고 하는, 그 거룩한 스티그마로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오늘 더 이상의 상처와 아픔으로 고통받는 존재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우리를 부르신!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힘을 얻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다시 한번 더 능히 승리하며 나아가는 우리 연합감리교회의 형제자매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고통받으며, 우리 몸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로, 아파하고 좌절해 왔지만 이제 우리가 그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이제는 고통이 아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거룩한 흔적이요, 성흔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받은 그리고 우리가 받게 될 모든 고통과 상처들이, 은혜의 순간으로 바뀌는, 놀라운 기적을 허락하여 주옵시고, 주님이 새겨 주신 그 거룩한 성흔을 의지하여 또다시 승리하는, 우리 연합감리교회 한인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우리들의 가야 할 방향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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