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마무리 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들어가신 도성이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다윗의 도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다윗왕이 통일왕국을 세우고 나서 첫 번 성읍으로 정한 곳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어원으로 보면 “예루”는 ‘도시’라는 뜻이고, 살렘은 “평화”라는 의미입니다. 곧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혹은 평화의 성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세운 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도시라고 선포했던 겁니다. 이후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루살렘은 일종의 평화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지성소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민족의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반면 주변 이민족들은 이를 비아냥거리거나 빈정대며 불렀다고 합니다. ‘너희만 평화의 도시에 살고, 너희만 하나님의 가호 아래 있느냐’는 불평입니다. 그래서 이민족들은 살렘이라 발음하지 않고 ‘솔뤼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솔뤼마’라는 말은 “평화라고?”란 뜻으로 ‘정말 평화가 있기는 한거냐?’는 식의 빈정대는 말투입니다. 유대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은 거룩하고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곳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예로 솔뤼마,’ 곧 정말 평화의 도시가 맞습니까? 라는 비아냥의 대상일 뿐이었던 겁니다.
헌데 놀라운 사실을 누가복음 19:28에서 찾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도한 예루살렘을 ‘에로 솔뤼마’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복음서 기자인 누가 조차도 정말 이곳이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찬양하던 평화의 도시가 맞긴 하냐는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십니다. 호산나, 저희를 이 어둠과 고통 속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외치던 사람들이 채 5일도 지나지 않아, 같은 입으로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쳤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달라며 울부짖던 이들이, 결국 그 평화를 깨고 분열과 비난, 그리고 죽음의 세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진정 이곳이 평화를 갈구하는 도시가 맞느냐 라는 질문이 나올 법한 상황입니다. 평화의 구원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음의 십자가로 향하게 만든 이곳이 진정 평화의 도시일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이 그 안에 섞여 있었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비아냥은 2천 년 전 그곳에서만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과연 어떤가요?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우리 시대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전입니다. 평화의 공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 밖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안식처로서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요 역할을 감당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를 예루살렘이라 부르지 않고, ‘예로 솔뤼마’라고 빈정대는 것을 심심치 않게 듣게 됩니다. ‘정말 교회가 하나님이 계신 평화의 장이 맞아? 정말 세상을 밝히고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위로하는 안식처가 맞아? 정말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 맞아?’ 라는 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자비로 품어 안기보다 서로 십자가에 못박아 정죄하려 들던 사악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 안에 평화의 하나님이 계신 것이 맞습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그래서 평화의 구원을 누리기 위해 들어 오셨던 교회 문, 바로 그 문이 평화의 문입니다. 진정 우리 교회의 문은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안겨줄 평화의 문이 맞는지 되돌아 볼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