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결정 말고 다른 결정을 내렸으면, 지금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없으세요?
가끔 저는 그런 몽상을 해보거든요.
굵직한 선택을 내렸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든지, '그때 내가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일반 대학에 갔다면 내 인생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혹은 ‘그때 내가 미국에 오지 않고, 한국에 남아있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등등 말이에요.
누가 알겠어요.
제가 미국에서 목사로 살지 않고, 한국에서 회계사로 잘 나가고 있을 수도 있고, 좀 뜬금없지만 아프리카에서 농부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정말 ‘만약(what-ifs)’만큼 불확실하면서도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하는 단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직 양자경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뜻밖에 찾아낸 보물 같은 영화였습니다. B급 영화의 클리셰를 모두 따라가면서 동시에 A급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발한 상상력이 담긴 놀라운 영화인데요, 지난 3월 12일에 열린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을 석권하고, 그랜드슬램으로 불리는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주연상과 각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제외한 모든 부문을 수상한 기록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영화에 남자주인공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받을 수 있는 모든 메이저 상을 받은 셈이지요.
간단히 영화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면, 중국계 이민자인 에블린(양자경 분)은 다 쓰러져 가는 오래된 코인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였다가 후에 연인이 된 웨이먼드(키호이콴 분)와 결혼한 후 홍콩에서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회상에서 보이는 에블린의 과거는 찬란합니다. 꿈의 땅 미국에서 가게를 소유하고, 사업을 시작한 젊은 날의 그녀는 반짝이는 눈에 밝은 희망을 가득 담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이민 생활은 반짝이던 그녀를 빠르게 침식합니다.
기쁨이었던 딸 조이는 이제는 만나면 서로 으르렁대기만 하는 사이로, 생활력 없이 착하기만 한 남편 웨이먼드는 너무나 하찮은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삐그덕거리기 시작하자, 반짝이던 에블린은 매사에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중년의 여인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던 그녀에게 우주에는 여러 개의 유니버스가 존재하며, 그 속에는 무한대의 에블린이 있다는 사실과 수많은 에블린 중 자신이 절대 악으로부터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영화에서의 멀티버스(다중우주론)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다양한 평행 우주가 형성된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실까 아니면 차를 마실까를 고민하면, 커피를 마시는 우주와 차를 마시는 우주, 그 두 개의 우주가 생겨난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끊임없이 파생우주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삶에 다가온 멀티버스를 타게 된 에블린은 수많은 에블린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중 웨이먼드와의 결혼하지 않고 헤어진 후 홍콩에 남아 있는 유명한 배우가 된 에블린이 아주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에서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눈부시고 아름답게 사는 모습에 현재의 에블린은 자신의 초라한 삶을 더 비참하고 끔찍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 인생은 그로 인해 잘못되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 영화의 매력적인 콘셉트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비참한 삶을 바꾸어 행복한 주인공을 만드는 것이 아닌, “내가 한 모든 크고 작은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의 선택이 모이고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 모든 선택을 거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요? 그리고 그 선택의 여정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예수님은 물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 집안에서 자라 고등학생 시절 예수님을 영접한 저는 친구들과 함께 서울의 큰 스타디움에서 열린, 당시 꽤 유명했던 신앙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현장에서 마치 슈퍼스타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등장한 한 목사님은 “예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감동적인 예배였지만 그 메시지 속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에 붙들려 저는 아주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위해서는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의 의미는 ‘나를 부인’하는 것인데, 곰곰히 생각해 볼 때, 저는 부인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거든요. 무대 위의 목사님처럼 열정적으로 모든 민족을 제자 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능력에 낯도 가리고 부끄럼도 많았던 저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그렇게 유약하고 부족한 나라는 존재가 아닌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부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는 놀랍게도 그들에게 친숙한 세계로의 초대였습니다. 어부들에게 “어부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의 직업이 선생이었다면 “선생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어부인 그들에게 랍비나 선생 또는 선지자나 예언자가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부가 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그것은 그저 그들이 이미 평생 해온 어부로서 예수님을 따르면 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로서,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따르라는 초대였던 것입니다.
“너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며, 진실하고 참된 너 자신이 되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 말이지요.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에블린은 마침내 절대 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에블린은 다른 잘난 버전의 에블린들이 아닌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는 현재의 에블린이 바로 세상을 구한 에블린이며, 과거 다른 결정을 통해 만들어진 또 다른 에블린보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가족과 행복하게 지내는 현재의 에블린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에블린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금의 나와 다른 멋진 누군가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진실하고 참된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부르심이니까요.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참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이 유니버스에서 따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부르심 아닐까요?
영화 속 양자경은 제 어머니가 재래시장에서 오천 원에 사 와 입으셨어도 어색하지 않을 촌스러운 몸빼바지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한 채 세계 곳곳을 누빕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은 제 어머니 같기도 하고, 우리 교회 권사님 같기도 한, 화려하지 않은 이민자의 모습이며, 세상을 구한 주인공입니다.
그렇네요.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바로 세상을 구할 예수님의 제자임을 한 번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진실하고 참된 나 자신을 찾는 우리의 여정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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