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세상 권력에 맞선 고백의 유산

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

(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패밀리>에 대한 현혜원 목사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 이름의 깊은 뜻을 곰곰이 되새길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근원적이고 놀라운 부르심을 받았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리스도인(Christianus)”이라는 명칭은 처음부터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사람들의 삶이 너무나 뚜렷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모습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ianus’라는 접미사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카이사르를 따르는 사람을 “Caesarianus”라고 불렀듯 특정 지도자나 사상가의 추종자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은 처음부터 존경이나 환영의 의미를 내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힘없고 변방이었던 갈릴리 지방의 목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질서와 권위를 거스르는 괴상한 단체로 보였을 뿐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여러모로 조롱과 멸시가 담긴 말이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름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가장 영광스러운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제국과 초대교회의 충돌: 주님은 누구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후 신격화(divus)가 된 것을 배경으로,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주장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로마 동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후 신격화(divus)가 된 것을 배경으로,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주장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로마 동전.

초대교회가 존재하던 로마 제국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였습니다. 황제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동전(1)에 “DIVI F(divi filius, 신의 아들)”이라는 문구를 새겨 경배의 대상임을 강조한 살아 있는 신이었습니다. 로마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디서든 황제의 이름과 위엄을 느낄 수 있었고, 황제 숭배는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는 의무였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압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은 폭탄과도 같았습니다.

예수는 주님(Lord)이십니다.(Κυˊριος Ἰησοῦς)”

이 선언은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 “황제를 주(Lord)”라 부르라는 제국의 요구에 정면으로 맞서는 정치적 저항이었습니다. 황제 숭배의 하나인 제의에서 향을 태우라는 요구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합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며, 신앙과 권력의 경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은 종종 무신론자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역자로 몰렸습니다.

그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네로 황제의 박해 아래 많은 이들이 원형극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거나 화형을 당하는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인들은 황제의 권력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르기를 선택했습니다. 핍박 속에서도 그들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며,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예수님 또한 로마 제국의 핍박에 굴하지 않은 채 사랑과 치유의 기적을 전파하셨으니,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순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핍박에서 국교로: 로마 국교화의 양면성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거치며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State Religion)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는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 끝에 얻어낸 해방이었습니다. 더 이상 신앙 때문에 생명을 잃을 염려 없이, 교회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마침내 하나님의 도덕적 가치를 인정하는 듯 보였기에, 많은 이들은 이를 당연한 신앙의 승리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교회의 근본적 변질을 가져온 비극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세상 권력에 저항한 초대교회의 저항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핍박받던 소수자 공동체에서 제국을 움직이는 권력 기관으로 변모했습니다. 신앙과 국가가 결합하면서, “예수는 주님”이라는 고백은 더 이상 황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 이념을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속화에 실망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집트의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원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한 것도 이때의 모습입니다.

로마 황제의 옥좌에 하나님의 십자가가 세워지는 순간, 교회는 세상의 권력을 비판하는 선지자적 목소리를 잃고, 세상 권력의 축복자가 되는 위험에 빠졌습니다. 이 국교화는 하나님의 왕국과 특정 지상의 권력 을 동일시하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으며, 바로 여기서 현대 기독교 국가주의의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주의(Christian Nationalism)와의 충돌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미국에서 등장한 기독교 국가주의는 그리스도인의 본질과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국가와 엘리트를 신성시하는 우상 숭배적 오류

기독교 국가주의는 미국을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나라”로 신성시하며, 국가의 정체성을 기독교 신앙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이는 특정 국가를 교회의 십자가와 국기로 상징화하여 국가를 신성시하는 우상 숭배적 오류에 빠지게 합니다. 결국 “미국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착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더 패밀리(The Family)>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러한 사상의 극단적 형태는 하나님이 소수의 “선택된 리더”들만 세워 나라를 움직이신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리더가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다는 위험한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가 동등하게 부름을 받았다는 “만인 제사장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과, 섬김을 본질로 하는 성경적 리더십의 정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국가 이익 중심의 정치 구호와 ‘문화 전쟁(Culture War)’이라는 이념적 투쟁을 복음의 핵심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적 귀결은 결국 기독교의 복음을 특정 정치 이념—예컨대 미국 백인 기독교 중심주의(White Christian Identity)—을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구원의 메시지가 특정 국가나 인종의 문화적 지배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축소되는 것이죠. 우리는 로마 황제를 거부했던 초대교회처럼, 교회의 궁극적 충성이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닌, 국경을 초월한 하나님의 왕국에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세속 권력 추구와 배타성의 위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나눔을 통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주의는 정치권력을 통해 특정 기독교 가치를 강제로 법제화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불법 이민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거나, 임신부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조차 낙태를 전면 불법화하는 정책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복음의 핵심 정신을 외면한 채,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행위입니다. 이런 배타적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왜곡합니다. 기독교의 나라를 지향한다면서, 정작 정책과 실행에서 사랑보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통한 통제의 논리가 느껴지는 것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갈릴리의 예수님께서 오늘 여기에 임하신다면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실까요.

<더 패밀리>에서는 놀랍게도, 예수께서 워싱턴 DC에 계셨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 있는 사람들을 예수께로 돌아오게 만들어 국가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실 것이라고요. 그러나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만약 그런 예수님이었다면 이천 년 전에도 단숨에 로마 제국의 수도로 쳐들어가 거기서부터 사역을 시작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힘의 중심이 아닌 곳, 먼 변방의 소외된 땅,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것도 가난하고, 핍박받고, 무시당한 사람들 틈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셨고, 그들을 고치고 가르치셨습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본질 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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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국경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을 섬기기 위해 보냄 받은 이들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주의는 복음의 초점을 영혼 구원과 섬김 대신 국가 권력 확보로 전환합니다. 이들은 국가의 이익을 그리스도의 뜻과 동일시하며, 국가를 신앙의 궁극적인 대상이자 목표로 삼는 뒤틀린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국경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국 찬송가의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가사처럼, 힘 있는 국가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주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선택받은 것’처럼 보이는 소수의 백인 지도자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갈색 피부의 이국어를 하는 이민자들에게도,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유산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이름은 세상의 왕관과 권력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모시겠다는 영광스럽고도 고독한 고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는 항상 낮은 곳에서 약한 자들을 가르치고 고치셨습니다. 권력을 탐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의 하수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이십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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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diglib.library.vanderbilt.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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