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자의 삶에서 예배자의 삶으로

나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목회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과 일에 중독된 삶을 살아온 건강하지 못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마치 교회와 결혼한 것처럼 살면서 삶과 사역의 우선순위조차 제대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과오로 점철되어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2015 년 7월부터 2016년 6월 말까지 1년간 안식년을 보내면서 지난 24년간의 목회를 되돌아보면서 회개에 회개를 거듭해야만 했다.

되돌아보니, 내가 목사라고 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무신론자와 별 다름없는 모습을 살아왔다는 자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고 했으니 무신론자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예수님의 만져 주심과 위로하심을 맛보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고, 안수를 받아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목회를 하면서도 인간적인 노력이 더 컸었다.

지난 사역을 되돌아보니 미국 교회에서도 부흥을, 한인 교회에서도 부흥의 맛과 열매를 거둔 경험도 있지만, 솔직히 하나님께만 영광을 드렸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 충만하고 기뻐야 하는데, 오히려 예배를 드리고 나면 허무하고 허전하고 외롭고 슬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만히 보니 한때, 아직도 그 버릇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고 있지만, 설교를 잘하는 것을 목회의 전부로 알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역의 중심이 마치 “기-승-전-설교”였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되는 줄 알았고, 사람들의 인정도 받기를 소원했고,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를 준비하고, 어느새 예배자가 아니라 설교자로 둔갑되어 있었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나의 교회로 착각하지 않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찬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예배와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모을까 고민하는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요한복음 6장 28~29절의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새롭게 마음을 뜨겁게 했다. 영어 성경을 보니 유대인들은  “What must we do to perform the works of God? 하나님의 <일들>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고 묻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 The work of God”이라는 단수로 표현하고 유일한 일로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러 가는가?

나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에 나아 가는가, 아니면 설교를 들으러 가는가? 설교자가 영광을 받고, 설교자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함으로 인해 예배는 사라지고 집회만 남고, 예배자도 사라지고 청중만 남아버린 아픈 교회의 모습은 없는지,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설교가 중심이 되어 버리지는 않았는가?

나를 되돌아보니, 나의 사역이 그랬다는 고백이다.

모든 예배의 순서와 설교에 종속된 예배라는 이름의 집회,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흥분시키는 예배를 성령의 역사라고 착각하면서 자기만족에 빠졌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미 2천 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베풀어졌는데 여전히 복을 갈구하고 탐하는 우리 신앙인의 모습과,  그것을 더욱 조장했던 나와 같은 목회자의 모습을 보면서 탕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의 유산을 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로 인하여,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거룩한 일이 사라지고, 마치 알라딘의 램프에서 나오는 지니를 원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치부하고 이끌던 나의 모습 말이다.

오늘 드린 예배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교인일까 하나님이실까?

오늘 예배를 통하여 누가 영광 받을까보다는 오늘 얼마나 능력이 나타났는지에 관심 많은, 유대인들처럼 표적을 구하는 신앙을 주입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명의 떡이 되시고자 마구간의 구유(먹이통)에 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이미 온 천하에 가득한데 말이다.  

나는 영어회중을 18년 동안 섬기고 한어회중도 6년을 섬겼고, 교회와 결혼한 과오가 있고, 일과 사역에 중독되었던 실천적 무신론자였던 목회자로서 감히 고백을 하건대 오늘 2천 년 전에 갈보리 언덕에서 베풀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 나의 죄인 됨과 구주의 보혈의 능력을 선포하고, 그 은혜 아래 무릎을 꿇는 것 외에 필요한 것은 단언컨대 없다.

목회자가 구해야 할 것은 어설픈 설교자 혹은 설교의 중독자를 양산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 아닐까? 설교자가 설교 좀 못하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오늘날 교회는 목회자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 목사들의 그 "뛰어난 설교" 때문에 교회가 부패하고 죽어가고 있다고 보시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지 무슨 설교자의 능력일까?

설교만 들으면 예배 다 드렸다고 착각하는 부패된 예배로 신음하는 교회를 본다. 그렇다고 내가 숙제를 안 하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천덕꾸러기는 아니다. 나도 한 설교 한다는 얼빠진 자부심과 교만이 있지만, 사실 TV를 켜거나 인터넷에 들어가면 나보다 설교 잘하는 목사, 그것도 멋진 영어로 설교하는 목사가 흘러넘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가는가?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러 나오는 것이다. 나를 드리려고 가는 것이다.

예배에 나와 축복받는 것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자신의 웨이터 정도로 여기는 것밖에 안 된다. 자신의 물질적 욕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것을 가르치는 것, 십자가 없는 기독교, 자기 부인이 없는 기독교, 자기희생이 없는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빠진 무늬만 남은 기독교, 그것은 아무리 열심 있는 종교 생활을 아무리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종교 행위일 뿐이다.

타인종 목회로 돌아와, 나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자고 선포했다. 이젠 교회의 부흥이 목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공동체가 되자고 했다.

나도 영적으로 갈급한 영혼들에게 귀에 솔깃하고, 다디 단 설교를 주입하고, 설교 중독자들을 양산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도록 인도하는 제사장, 예배 공동체인 교회로서의 사명을 회복하고,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고 증거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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