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감리교회의 태동과 분열 그리고 통합의 역사(1부)

편집자 주: 역사적으로 미감리교회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떠한 문제로 갈등을 겪었으며, 그 갈등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를 3번에 걸쳐 싣는다. 오늘은 그 시리즈 중 첫 번째로 초기 미감리교회에 관한 글이다.
1784년 12월 27일, 미감리교회가 결성된 크리스마스연회에서 프랜시스 에스베리를 감독으로 성임하는 모습. 크리스마스연회는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 북미에 있는 성공회로부터 분리 그리고 영국의 웨슬리와 감리교로부터 분리 등 3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길크리스트의 판화, 뉴욕, 1882. 사진 연합감리교회 교회역사보존위원회 제공.
윤인선 목사, 다우너스그로브 훼이스연합감리교회, 일리노이.윤인선 목사는 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연회 소속으로 시카고 근교에 있는 다우너스그로브의 훼이스연합감리교회의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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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 23일 택사스 달라스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와 연합형제교회(United Brethren Church)가 통합하여 ‘연합감리교회(United Methodist Church)’를 새롭게 출범시켰다.

대부분의 한인감리교회는 연합감리교가 태동한 이후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인감리교회와 한인 목회자들은 현재 연합감리교회의 교리·구조· 정책·선교·문화 등에 익숙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논의되어 온 동성애 문제와 성에 관한 현격한 신학적 입장 차이 및 갈등으로 인한 교단 탈퇴 또는 교단 분리의 문제가 더 구체적이고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한인연합감리교회와 한인목회자들이 연합감리교회에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미감리교회의 태동

미국의 감리교 운동은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신대륙의 감리교인 수가 증가하자, 뉴욕의 토마스 테일러(Thomas Taylor)는 웨슬리에게 설교자들을 더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웨슬리는 리차드 보드만(Richard Boardman)과 조셉 필모어(Joseph Pilmore)를 파송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필모어 역시 감리교 운동의 급속적인 성장으로 최소한 두 명의 설교자가 더  필요하다고 요청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와 프랜시스 에스베리(Francis Asbury)를 파송했다.

이렇게 신대륙에서의 감리교인 수가 급속도로 성장하자 웨슬리는 북미 지역에 독립된 감리교회를 세우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토마스 콕(Thomas Coke)과 또 다른 두 설교자를 파송하여 공식적인 감리교 모임과 연회를 조직하도록 했다.

토마스 콕(1747-1814). 코크래인의  판화, 런던, 1860. 프랜시스 에스베리(1745-1816). 존파라다이스의 목판 유화, 뉴욕, 1812. 사진 출처, 1984년 드류대학이 출판한 책과 연합감리교회 역사보존위원회.(그림 설명 왼쪽부터)토마스 콕(1747-1814). 코크래인의  판화, 런던, 1860. 프랜시스 에스베리(1745-1816). 존 파라다이스의 목판 유화, 뉴욕, 1812. 사진 출처, 1984년 드류대학이 출판한 책과 연합감리교회 역사보존위원회. 

1784년 12월 24일부터 1월 2일까지 에스베리의 주재로 60여 명의 설교자가 모여 ‘크리스마스연회’로 알려진 첫 번째 연회를 개최했다.

이 연회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첫째, 미국 내 감리교 모임을 ‘미감리교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는 독립된 교회로 조직했다.

둘째, 콕과 에스베리를 새로운 교회의 감독으로 선출했다

웨슬리는 콕과 에스베리가 단순히 교회의 사역을 돌보는 ‘감리사(superintendent)’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을 비롯한 많은 설교자는 더욱 강력한 권한을 갖는 ‘감독(bishop)’의 직책을 원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연회 참석자들은 콕과 에스베리를 새로운 교회의 감독으로 성임했다.

셋째, 새로운 교리와 장정 22개의 조약과 신약 주해 등을 받아들였다.

넷째,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당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은 영국 국교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연회의 결정은 3가지 분리-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리, 북미에 있는 성공회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영국의 웨슬리와 감리교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감리교회는 이후로도 계속 부흥하여, 1790년에는 213명의 설교자와 109개의 교구 및 58,000명의 교인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다.

크리스마스연회에서 결정된 감독직에 대한 견해와 노예제도에 대한 결정은 훗날 감리교회의 새로운 갈등과 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초기 개혁주의자들에 의한 갈등과 분열

강력한 감독의 역할로 인해 미감리교회는 민주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급속하게 부흥하던 감리교회는 결국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최초의 분열은 1791년 에스베리가 사우스케롤라이나의 찰스톤교회에서 사역하던 윌리암 햄멋(William Hammett)의 재파송을 거부함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찰스톤교회의 교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햄멋도 자신이 오랫동안 사역하던 찰스톤교회에서 계속 사역하기를 원했으나, 에스베리는 파송의 권리는 오직 감독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해멋과 교인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다른 설교자를 찰스톤교회로 파송했다.

햄멋은 1791년 그 교회의 교인 대부분과 함께 트리니티교회를 개척했다. 그들은 ‘원조감리교회(Primitive Methodist Church)’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으나, 1803년 햄멋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다.

1792년 제임스 오켈리(James O’Kelly)에 의한 분리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다.

오켈리는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파송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경우 연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절대 권한을 가진 감독의 권리, 특히 에스베리의 권위에 대한 오랜 불만과 불신의 결과에서 나온 요구였다.

오켈리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총회에서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자, 미감리교회를 탈퇴하여, ‘공화감리교회(Republican Methodist Church)’를 조직했다. 오켈리를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은 전체 감리교인의 15-20%나 되는 많은 교인을 확보했지만, 1801년경 그 변화의 동력을 잃어버렸다. 오켈리는 ‘크리스찬교회(Christian Church)’로 명칭을 바꾸어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지만, 교회는 더욱 분열되어 여러 교단에 흡수되었다.

19세기 초, 감리교 개혁을 주장하는 설교자들과 평신도들은 교회 정책에 그들의 더 많은 참여를 보장해 달라는 주장을 펼쳤고, 다음 세 가지를 요구했다.

1) 감독이 감리사를 지명하지 않고, 설교자들이 감리사 선출

2) 개체교회 설교자들에게 연회의 정회원 자격 부여

3) 평신도들을 목회자들과 함께 연회 대표로 선출하여 정책 결정에 참여 

그러나 이러한 개혁 운동에 참여한 목회자와 평신도들은 징계를 당하거나 교회에서 퇴출당했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1828년 총회에 상정했으나 그 안건은 부결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개혁 운동은 꾸준히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으며 성장했고, 1830년 11월 ’감리교개신교회(Methodist Protestant Church)’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새롭게 조직된 교회는 감독직과 지방 감리사직을 없애고, 연회에 평신도 대표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며, 목회자와 평신도 동수로 이루어진 총회를 조직했다. 총회는 선출된 총회장이 회의를 진행했다. (2부에서 계속)

 

관련 기사 보기

미감리교회의 태동과 분열 그리고 통합의 역사(2부)

미감리교회의 태동과 분열 그리고 통합의 역사(3부)

 

윤인선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1988년)와 동 대학원(1991년)을 졸업하고 도미하여 드루신학교에서 교회사로 박사학위(2008년)를 받았다. 한국 기독교감리회에서 안수를 받았고, 지금은 연합감리교회 북일리노이연회 소속으로 시카고 근교에 있는 다우너스그로브의 훼이스연합감리교회의 담임으로 섬기고 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615-742-5470 또는 [email protected]하시기 바랍니다.

교단
복음주의형제교회와 감리교회가 통합되어 연합감리교회로 출범한 지 4년 후인 1972년 총회에서 성정체성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사진, 연합감리교회 교회역사보존위원회 제공.

미감리교회의 태동과 분열 그리고 통합의 역사(3부)

1938년 남감리교회와 미감리교회가 재결합하며 흑인 회중으로 구성된 중앙지역총회를 만든다. 1968년 감리교회와 연합형제교회가 통합하면서 중앙지역총회는 사라졌지만, 1972년부터 시작된 동성애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교단
1858년 5월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열린 남감리교회 총회 모습. 사진 출처, 미국 의회 도서관 LC-DIG-ppmsca-07829.

미감리교회의 태동과 분열 그리고 통합의 역사(2부)

미감리교회는 1836년과 1840년 총회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끝내 미(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로 분리되었다.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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