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와 9·11

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사진 제공, 김선중 목사.

9·11 비극이 일어난 지 벌써 20주년이군요. 당시 텍사스에 살던 제가 생방송으로 전해지던 이 뉴스를 경악과 전율로 지켜보았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저는 성조기를 달고 범퍼에 “United We Stand”라는 스티커를 붙인 채, 길거리를 메운 차들을 볼 때마다 이민자로서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 저는 그 비극을 다시 떠올리며, 교회력의 복음서(마가복음 7:24-37)를 바탕으로 “사랑”에 대한 주제를 성찰하려 합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소녀와 말이 어눌한 귀먹어리 남자가 있습니다. 자신의 주체성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소녀와 삶의 기본 조건인 듣고 말하는 것에 장애를 가진 남자. 그들은 통전적인 삶의 선물을 영위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 벌 받은 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제 아들은 5살이 되어서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러 명과 함께 담소하는 자리에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강아지 한 마리를 얻었는데, 아직 제대로 짖지를 못하고 낑낑거리는 소리만 낼 뿐이어서, “너는 꼭 우리 목사님 아들 같구나.”라고 강아지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태연한 척했습니다만 쓰라리던 제 마음을 어찌 형용할 수 있었겠는지요.

밤에 잠든 아이의 얼굴을 매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아빠는 알아. 너는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크리소스톰이라는 분처럼 위대한 스피커가 될 것이란다. 아빠는 하나님께서 너에게 황금의 입을 주셨다고 믿어. 네가 입을 열어 말할 때면, 세상이 네 말의 힘에 놀랄 거야.”  

그리고 일 년 후 녀석의 말문이 갑자기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소녀의 어머니는 시리아(Syria)와 페니키아(Phoenicia)라는 말의 합성어인 수로보니게(Syrophoenicia) 출신의 이방인입니다. 남자인 예수님께 여자가 직접 찾아가는 것은 당시 문화에서 수치였지만, 그녀는 예수님께 나아와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순간 뜻밖에도 예수님은 자녀에게 주어야 할 음식을 개에게 던져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이 아닌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이 돌보아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겠지만, 누가 들어도 매우 거칠고 모욕적인 말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제한된 시공간에 들어오신 성육신의 실제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신 것일 수도 있고, 식민지 유대인 남성으로서의 편협한 자기 이해가 반영된 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어머니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주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에서 딸의 치유를 원하는 그녀의 불타는 마음을 보셨고, 즉시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데가볼리 쪽으로 가셨을 때, 사람들은 귀먹고 말이 어눌한 자를 예수께 데려와 고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열려라.”라고 하시자, 그 남자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어져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대학생으로 잘 성장했지만, 잠든 아들을 마음 아프게 내려다보던 그날 밤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제 아이가 지금까지 말을 하지 못했을지라도, 저는 계속해서 그 기도를 했을 것이며, 저희 아이가 황금 입을 가졌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된 저의 마음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겠지요.

이방 여인의 믿음으로 예수님은 마음을 바꾸시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또한 모두를 품으시며, 영육간에 통전적이고 복된 삶을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향해 예수님의 방향을 다시 돌리시어, 본래의 메시야적 사명을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찢어졌고(막 1:10),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으며(막 15:38), 땅의 바위가 터졌고(마 27:51), 무덤이 열렸습니다(마 27:52).

예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고, 온갖 경계와 벽을 허무시며, 죽음의 세력을 무효화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가득한 새로운 지평을 여셨습니다.

9·11가 20주기를 맞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생각합니다.

아직도 죽음의 문화로 가득한 옛 하늘과 옛 땅에 안주하며, 온갖 경계를 짓고 벽을 쌓아 올린 채, 그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봅니다.

위에 언급한 성서 본문에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던 그 소녀나 그 남자의 믿음은 언급되지 않네요.  오직 그 소녀의 어머니와 그 남자의 친구/이웃들의 믿음으로 인해,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비극을 겪으며 비참한 상황에 있는 우리의 동료 인간과 동료 피조물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그 사랑의 힘(Power of Love) 대신, 9·11의 비극을 계속 만들어 내는 힘에 대한 사랑(Love for Power)으로 무장한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Within You Without You”라는 노래를 저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눌 수도 있었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의 사랑으로 그것을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으로 세상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냉랭해진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세상을 얻는 대신에 영혼을 잃어버리는 사람들. 그들은 알지 못하지. 볼 줄도 모르지. 당신도 그들 중 하나인가?”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며, 저는 손턴 와일더가 1927년에 쓴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묘사된 여러 종류의 사랑을 떠올려봅니다.

1714년 7월 20일 금요일 정오에 페루에서 가장 멋지고 견고했던 다리가 무너져, 다리를 지나던 여행객 5명이 다리 아래 골짜기로 추락해 죽었습니다.

10분 전에 그 다리를 건넜던 프란시스코회 주니퍼 수사는 그들이 당한 비극 배후에는 “어떤 우주적인 계획”, “신의 의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죽음을 당한 그들의 삶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고 확신하고는 6년 동안 그들의 삶을 추적하여, 역사적, 수학적 그리고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의 기록은 불태워지고 그는 화형을 당합니다. 인간의 삶은 수치로 도식화될 수 없다는 것, 도덕주의적이고, 인과론적이고, 숙명적인 이해는 거부해야 한다는 것, 신학을 단지 과학 속에 위치시켜서는 안 된다고 이 소설은 주장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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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외모와 말을 더듬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자란 몬테 마요르 후작 부인 마리아는 예쁜 딸이 태어나자 그 딸에 대해 우상 숭배적인 사랑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타적인 사랑은 불신하고, 오직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하는, 소유하고 구속하며, 통제하려는 탐욕스러운 사랑입니다. 하지만 딸인 클라라는 엄마를 피하려고, 결혼해 머나먼 스페인으로 도피해버리게 되고, 마리아는 자신이 인생에서도 사랑에서도 한 번도 용기를 내본 적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내일부터는 순전한 사랑을 시작할 것이라 결심한 마리아는 수녀원장의 허락으로 데려다 함께 살던 소녀 페피타와 함께 그 다리를 건너다 죽습니다.

에스테반이란 젊은이는 일란성 쌍둥이 형 마누엘과 함께 수녀원에 버려져 수녀원장의 보호 아래 성장합니다. 형 마누엘은 극장의 희극 여배우인 카밀라 페리콜의 편지를 대필하다 그녀를 짝사랑하게 되고, 자신을 잃은 채 오직 그녀에 대한 격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얻을 수 없는 대상을 갈망하는 마누엘의 사랑으로 둘 사이가 벌어지며, 박탈감을 느끼게 된 에스테반은 형이 무릎 부상으로 인한 감염으로 죽자, 절망하게 되고, 자살하고 싶어 하던 그를 위로한 선장의 조언으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바다로 나가기 위해 그 다리를 건너다 죽습니다.

일찍이 가출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열정과 아름다운 여인들에 대한 숭배 그리고 스페인 문학에 심취한 삶을 살던 피오 아저씨는 사랑할 능력, 즉 사랑의 고통을 감수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지독한 열병으로 이해하면서, 그 사랑을 거쳐야만 성숙해지고, 사람을 기계적인 대상으로 여기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던 그는 천연두로 인해 미모를 잃고 폐인처럼 살던 카밀라를 설득하여, 그녀의 어린 아들 하이메를 교육시키기 위해 리마로 데려가다 다리에서 히이메와 함께 죽습니다.

카밀라가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살길 바랐던 피오 아저씨와는 달리, 사고를 당하지 않은 카밀라가 이해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귀부인이 되고 싶던 그녀는 총독의 정부가 되어 사교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과 자기 관심의 극단적 표현일 뿐이었기에, 천연두로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잃게 되자,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은둔하고 폐인처럼 살아갑니다.

신앙인인 우리의 사랑은 어떤 것인지요?

요한일서가 증언하는 바대로, 죽음의 대척점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3:14). 즉, 사랑은 죽음을 부정하고 이겨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이러한 진실을 수녀원장인 마드레 마리아 델 필라르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불쌍한 인간의 영혼을 품어주며,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을 돌보고 싶은 소망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지만, 소망을 잃지 않고 실천하며, 고아들인 페피타와 마누엘, 에스테반 쌍둥이를 키워냅니다. 그리고 사고로 아들과 피오 아저씨를 잃은 카밀라 역시 그녀에게서 안식을 발견하고, 함께 수녀원에 거하게 됩니다.

다부이레 백작 부인이 된 클라라가 찾아왔을 때, 수녀원장은 그녀에게 “사랑 안에서는 우리가 범하는 실수조차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소설은 필라르 수녀원장의 독백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도 머잖아 죽을 것이고, 그 다섯 사람에 대한 기억도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도 잠시 사랑받다가 잊혀질 것이나 사랑 그 자체로 충분할 것이다. 사랑의 모든 추진력은 그 추진력을 만들어낸 사랑으로 되돌아간다. 사랑에는 심지어 기억조차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산 자를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자의 땅이 있지만, 사랑은 그 둘을 잇는 다리다. 오직 사랑만이 살아남을 뿐이며, 의미를 지닌다.”

9·11 이후 2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죽임의 문화로 가득한 이 세상에 절망하면 할수록 저는 사랑의 추진력을 갈망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과 귀 그리고 눈과 마음을 열어주시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물든 그 사랑을 담대히 실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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