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감리교 130주년을 축하하며...

1885년 4월 5일 비 내리는 부활절 주일 오후 3시, 감리교의 한국 첫 선교사인 Henry Appenzeller목사는 서울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로부터 130년이 지난 2015년 4월 5일 부활절 주일에 Marcus Matthews감독과 볼티모어-워싱턴 연회 리더들은 이 부활절의 기적과 역사를 축하하기 위해 그 발자취를 따라갔다.

Appenzeller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무덤의 문을 깨뜨리신 주님께서 빛과 자유를 한국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Matthews감독은 이 기도를 다시 상기시켰다. John Goucher목사를 기념하며 세워진 중앙감리교회에서 Matthews감독은 모두에게 변화의 능력을 가지신 살아계신 주님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와서 보라”라고 선포하였고, 또한 “가서 전하라”고 설교했다.

“와서 주님의 영광을 보라”와 “가서 주님을 전하라”라는 구절은 한국에서의 감리교회 여정을 잘 요약한 것이다.

1885년 감리교회의 한국을 향한 여정은 Goucher목사가 기차를 타고 미 전역을 여행하던 몇 해 전부터 시작되었다. Goucher목사는 당시 볼티모어의 Goucher대학의 총장이었으며 감리교 근원이 되는 교회인 볼티모어의 Lovely Lane 감리교회의 목사였다.

Goucher목사는 기차에 동승한 당시 미국의회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 디씨로 가는 황후의 조카를 포함한 한국 지도자의 대표단을 만날 수 있었다. Goucher목사는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였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감리교회 감독선교협의회에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49000불에 해당하는 $2000불의 수표를 편지와 함께 보냈다.

이 기금은Appenzeller와Dr. William B. Scranton그리고 그들의 아내들과 Scranton의 어머니인 Mary여사를 감리교 선교사로서 한국으로의 파송이 가능하게 만든 종잣돈이 되었다.

선교사들의 삶을 반영하는 Goucher목사의 말에 의하면 “모든 선교지는 선교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따를 때 어떠한 곳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벋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순종은 하나님 안의 역동적인 신앙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한 가르침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는 믿음이다.”

한국 감리교회 탄생에 기여한Appenzeller와 Scranton 그리고 그들이 여기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신실한 주님의 종이었다. 전쟁과 탄압의 영향을 받은 문화 속에서 선교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편안한 세계를 떠났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들은 열심을 다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이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의술과 모든 이들에게 교육기회의 제공하고 주님의 부활을 전하는 설교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였다. – 주님의 나라는 이와 같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Henry Appenzeller는 도착한 지 얼마 후 딸이 태어나며 한국인들 사이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첫 번째 감리교회를 시작했고 배재학당을 설립했으며 모든 한국인이 읽을 수 있도록 성경 번역작업에도 참여했다. 교사와 목사로 그는 17년 동안 이 나라에 성령의 불이 일어나도록 노력하였다.

의료선교사인 William Scranton는 처음에 그의 집에서 환자들을 치료하였고,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인 Universal Relief Hospital(광혜원)을 설립했다. 그 병원에는 이런 간판이 걸려 있었다. “남녀를 막론한 모든 병든 사람들은 미국인 의사를 보려면 아무 때나 빈 병만 가지고 오십시오.” 빈 병들은 그가 제공하는 약을 넣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여기 있던 처음 한 해 동안 1,000명 이상의 환자를 돌보았다고 기록돼있다.

Scranton의사는 또한 그의 어머니를 한국으로 모시고 온 것으로 더 유명하다. 그 당시 53세였던 Mary F. Scranton 여사는 감리교 감독선교협의회에 의해 한국에 파송된 첫 번째 여성 외국선교 협의회의 소속 선교사였다. 그녀가 바로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의 설립자이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The Salvation for All Women Hospital(보구여관)을 설립했다. 이 병원에서 훈련을 받아 한국 최초 여성 의사가 된 김점동 박사는 모든 명예를 그녀에게 돌렸다. 이 세 명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한국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내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Matthews감독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메릴랜드 주 Ellicott City의 새로운 교회의 목사인 박대성 목사는 한국에서 온 교회역사학자이다.

박 목사에 따르면 당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선교에만 집중할 것이라는 한국 정부와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위의 학교들과 병원들은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곳이었고, 한국의 교육과 의료 부분의 발전에 기여를 했다.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된 학교와 병원들은 기독교에 편견을 가졌던 상위계층보다 “상민” 또는 “천민”이라 불리는 하위계층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박 목사는 말했다. 그로 인해 기독교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선교사들은 한국 정부와 협력하여 사역을 확대해 나갔다. 사람들을 많이 모아 복음전파를 하는 대신 학교와 병원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방법은 Goucher목사의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설교는 말보다 행동을 통해 먼저 이해된다.”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계속 섬기며 그들의 사역을 넓혀나갔다.

1887년 Appenzeller는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직접적인 선교활동에 들어갔다. 10월9일 그는 ‘벧엘예배당’이라는 이름의 정동제일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한국감리교회는 6,206개의 개체교회와 1,461,772명의 성도들과 10,326명의 목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활절 예배는 한국 감리교 선교자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열릴 여러 행사의 첫 예배였다. Matthews감독과 볼티모어-워싱톤연회 대표단은 이 행사들에 참여할 것이며, 자매결연관계인 남 연회를 방문을 하며 일 주간 행사를 마칠 예정이다.

글쓴이: Melissa Lauber, Director of Communications 볼티모어-워싱톤연회, MD
올린날: 2015년 4월 8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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