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굴원이라는 충신이 있었습니다. 그가 간신의 모함을 받아 낙향한 뒤, 어느 날 낙심한채 길을 걷고 있는데, 이를 보고 한 어부가 지었다는 싯귀가 있습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그것입니다. 후에 공자가 이를 듣고, 갓끈을 씻을지 아니면 발을 씻을지 사람의 마음을 걸정하는 모든 것은 결국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며,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후에 남으로부터 모욕을 받듯이 한 나라도 스스로를 짓밝은 연후에 다른 나라에게 짓밝히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맹자, 離婁上).
맑은 물을 함부로 더럽히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더러운 물은 아무 주의 없이 대하기 쉬운 법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맑은 사람은 함부로 대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 망가진 사람은 대하는 사람 역시 격식을 다 갖추어 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에서 공동의 규칙과 기준을 함부로 어기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부당하고 부정한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허울뿐인 규칙과 기준을 따르지 않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창랑이든, 한 개인의 양심이든, 아니면 한 나라이든간에 흐트러짐 없이 그 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은 맑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제자의 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듯 제자를 바라보며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제자들의 모습이 맑은 물과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과는 구별되어 맑은 물처럼 거룩한 제자가 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역시 어둠과 죄악에 물든 시선을 결코 거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를 향한 날선 비판과 성도들을 보는 세상의 예사롭지 않은 시선은 결국 우리 자신이 맑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자정하여 맑은 물이 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한 비난과 곱지 않은 눈길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거룩하고 성결한 말씀으로 깨끗이 씻김 받아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믿는 성도들이 먼저 그 자정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점차적으로 오염을 정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전한 믿음을 다음 세대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주님의 제자로, 또 믿음의 자녀로 부름 받은 이들의 소명입니다. 변화된다는 어려움과 그로 인해 겪어야 할 불편과 고통은 분명 견뎌야할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지날 때, 비로소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상과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다음 세대에 오염된 물이 아니라 맑은 물을 전하는 기쁨이 생겨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본보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 흔들림없는 믿음으로 순종한 인물입니다. 결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부정과 의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마치 맑은 물처럼 깨끗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그의 자식에게까지 흘러 넘쳤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 역시 닮아 있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순종했던 것처럼, 아들 이삭도 아버지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날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삭은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따라 평소 맑은 물처럼 살았던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만일 아브라함 앞에 선 하나님의 모습이 신성하지 않고 공평하지도 않으며 불완전한 이방신에 불과했다면, 또 만일 어린 이삭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이 방탕하고 부정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상황은 완전히 변했을 것입니다. 순결하고 흠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맑은 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교회인 우리도 그 모습을 닮아 맑은 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맑은 물처럼 순결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