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부터 고난주간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그 동안 사순절이 되면 40일, 30일 또는 20일씩 특별집회를 했는데, 올해는 프로그램으로 바쁘게 하지 말고, 교인들 편안하게 해드리자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고난주간 만큼은 새벽기도회에 교인들이 참석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내일부터 예수님 십자가 마지막 말씀을 묵상하는 기도회를 한 주간 가지려고 합니다.
옛날 노래 중에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불렀지만, 저는 김도향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조금 제멋대로 살아온 것 같은 외모를 가진 그가 걸쭉한,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목소리로 불러야 그 노래는 제 맛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순절 제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예수님 말씀 잘 듣지 않고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입니다. 목회를 이제는 제법 오래 했는데도 계속 늦게 또 다시 반성하고 회개하고 살기를 반복합니다.
미국 신학계의 최고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십자가 위의 예수’를 읽다가 여러 번 울었습니다. 감동적인 글도 아니고, 대단히 신학적인 도전을 주는 내용도 아닌데 스타벅스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다른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그 동안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고통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너무 다 잘 안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교만한 일인지 부끄러움이 왈칵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하우어워스 같은 대단한 신학자가 예수님 십자가 마지막 말씀 하나하나 묵상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썼는데, 나는 사실 별것 아니라는 마음으로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말씀 앞에서 교만했는지 많이 반성했습니다.
오래 전 시카고 다운타운 시청 앞에 있는 Chicago Temple UMC에서 사순절기간 특별집회 강사로 저를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네 명의 강사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영국에서, 한 사람은 독일에서, 그리고 저까지 모두 외부강사였습니다. 사순절기간, 수요일 점심 때 30분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비행기 타고 왔고, 다운타운 최고 호텔에서 잠을 잤습니다. 담임목사에게 아무리 큰 부자교회라고 해도 비용을 많이 들여서 이런 설교 시리즈를 매년 한다는 것이 너무한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제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에 꼭 필요한 하나님 말씀이 자기 교회에서 외쳐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광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전통적인 미국교회들은 성금요일이 되면, 정오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 말씀(가상칠언) 7언을 가지고 7명의 설교자가 설교를 합니다. 세 시간 동안 교인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킵니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사람들에게 편하고 편리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려다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교회를 포기하는 일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이 ‘쉽게 쓰여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은 일제침략에 짓밟혀있는데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에 대한 아픔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너무 쉽게 믿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앞으로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렵니다. 교만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하나님의 말씀과 내 삶이 만나는 노력을 오히려 소홀히 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내가 삶으로 경험해 내지 않으면서 교인들에게 부활의 감동을 내가 너무 쉽게 말하려고 애를 쓰는 일을 그만두어야 정말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교인들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오실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일부터 있을 특별새벽기도회에 초대합니다. 최소한 이번 한주간 만이라도 예수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하루에 30분 만이라도 깊이 생각하기 바래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우리들은 그분을 생각하는 시간에 너무 인색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우어워스가 말합니다. “우리 삶이 예수 그리스도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구원받았고, 말 그래도 영원히 산다는 것이 가능해졌음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발견하게 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나도 이런 사실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