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라는 이름의 남자-오늘 하루를 지날 ‘힘’을 주시는 하나님

(편집자 주: 이 글은 연합감리교뉴스의 <영화와 설교> 시리즈로, “오토라는 이름의 남자”라는 영화에 대한 현혜원 목사의 리뷰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글에는 자살에 대한 묘사가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현혜원 목사가 시카고 제일 ”템플” 연합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현혜원 목사. 

"You are not a complete idiot!” (너는 똥멍청이가 아니야!)

이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울음을 터트린 장면은.

스웨덴 소설이자 같은 제목으로도 제작되었던 <오베라는 남자>를 미국식으로 각색한 영화 <오토라는 남자(A Man Called Otto)”>는 참 따뜻한 영화입니다. 

괴팍한 할아버지 오토가 옆집으로 이사 온 엘살바도르 출신 이민자 마리솔에게 운전 연습을 시켜주고 있습니다. 마리솔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이야기하는 상냥하고 쾌활한 사람입니다. 사랑스러운 두 딸의 엄마이자 지금은 셋째를 임신한 상태죠. 그녀는 운전 실력이 형편없는데 오토가 고집해서 수동 운전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수동 기어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신호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차를 바로 출발시키지 못하자 뒤에서는 사정없이 경적이 울려대고, 마리솔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대는 차에 화가 난 오토는 차에서 내려 뒤차 운전자의 멱살을 잡고 협박하며 조용히 시키고, 마리솔은 결국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런 그녀에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오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 말 잘 들어요. 당신은 먼 나라에서 여기로 와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공부도 하고, 남편을 만나서 두 아이도 얻었어요. 이제 곧 셋이 될 거고요. 당신은 당신 가족도 잘 통솔하는 사람이잖아. 운전도 배울 수 있어요. 맙소사. 세상에는 운전할 줄 아는 똥멍청이로 가득 차 있는데, 당신은 똥멍청이가 아니에요!”

너는 똥멍청이가 아니라는 말이 그렇게 울컥할 말인가요?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거의 오열했으니까요. 욕 같은데 은근히 따뜻합니다. 오토의 말에 마리솔은 눈물을 닦고 차분히 기어를 넣은 다음 클러치와 브레이크를 움직이며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킵니다. 그렇게 그녀는 성공적으로 운전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도 수동으로요.

영화 “오토라는 남자”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소니픽처스코리아.영화 “오토라는 남자”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소니픽처스코리아. 

마리솔은 영화 초반 가족과 함께 이 마을로 이사를 옵니다. 사교성 좋은 그녀는 남편 토미와 함께 정성껏 만든 음식을 들고 오토의 집에 인사차 찾아옵니다.

오토가 퉁명스럽게 “내 이름은 오-로(Otto, 한국어로는 ‘오토’지만 영어로는 ‘오-로-‘쯤으로 발음합니다.)라 하오.”라고 인사하자 마리솔은 크게 웃으며, 남미식 억양으로 “오또?”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오토는 화난 목소리로 “아니, 내 이름은 오-로-라고!” 소리치고, 마리솔은 당황하면서 “오또? 제가 뭘 잘못 발음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면전에서 오토는 쾅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닫아버리지요.

남의 같지 않구먼.

당황하는 마리솔의 표정에서 저는 영어로 목회하는 제 얼굴을 언뜻 본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오토 할아버지 한두 번 그러는 게 아닙니다. 마을의 모든 이에게 소리를 질러대고, 윽박지르며, 고약하게 굽니다. 영어를 못 알아듣는 마리솔에게는 단어를 가르쳐주며 인상을 찌푸리고, 상점에서는 30센트 때문에 매니저를 부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강아지 산책 후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강아지를 던져버리겠다고 협박합니다.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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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는 죽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천장에 로프를 걸어 목을 매기도 하고, 배기가스를 차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기차역에서 뛰어내리거나 장총을 목에 대기도 하죠. 하지만 그의 자살 시도는 번번이 이웃들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갑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한심한 이웃을 도와주며, 그는 그날의 자살을 한 번 더 미루고, 또 하루를 보냅니다.

오토는 강박적인 사람입니다. 사회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사람 관계의 미묘함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아내 소냐는 달랐습니다. 흑과 백밖에 없던 오토의 세상을 아름다운 색채로 물들인 빛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오토의 삶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던 그녀는 6개월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홀로 된 오토는 흑과 백밖에 남지 않은 이 세상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는 소냐의 부재를 참아낼 수가 없고, 그녀 곁으로 가고 싶어 자살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소냐는 젊은 시절 남편 오토와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로 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임신 중이었던 그녀는 아이도 유산했습니다.

오토는 억울한 사고를 당한 아내를 위해 죽도록 싸우지만, 소냐는 싸우기 위해 살기를 포기한 것 같은 오토에게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이라며 싸우는 대신 살기를 선택하자고 합니다. 그때부터 오토는 소냐를 위해 살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 이유인 그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죠. 그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늘 죽고 싶은 그의 삶에 시끄럽고 정 많은 마리솔이 침입하고, 마리솔과 함께 그녀의 가족, 이웃, 소냐의 학생 등 여러 사람이 태피스트리처럼 엮이며, 오토의 삶은 어느덧 서서히 색이 입혀집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깨닫습니다. 소냐는 자신의 부재를 오토가 기꺼이 견디고 세상과 다정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요.

영화 “오토라는 남자”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소니픽처스코리아.영화 “오토라는 남자”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소니픽처스코리아.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소냐의 말을 기억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소냐의 곁에 갈 때까지 마을의 이웃들과 새 가족을 이루며 행복하게 지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왕 돕는 거, 이제는 한심해하지 않고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며 이웃들을 돕습니다. 이제 그의 주위는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합니다.

몇 해 후 심장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안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이제는 가족처럼 사랑하게 된 마리솔에게 유언장을 남기는데, 그 마지막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오또 할아버지(Abuelo Otto)”라고 읽습니다. 오-로-라고 읽지 않고요. 저는 그 부분에서 또 울어버렸습니다.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공지영 작가는 서문의 첫 머리말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서른 가지도 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야 할 이유를 생각하기보다 하루를 살 이유와 감사를 찾는 데 더 애쓰면서 우울증을 극복하고,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왔다고, 그리고 또 그렇게 지나는 중이라고 담담히 술회합니다.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이라는 소냐의 말은 우리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자주 ‘살아 있’나요? 매일을 살면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오토처럼, 혹은 매일을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채워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그처럼, 삶에서 ‘죽음’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는 고통의 성금요일을 살고 있나요,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기쁨을 살고 있나요.

오토는 아마도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삶의 등불 같던 존재를 잃었는데 우울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겠죠. 다행히 오토에게는 성가실 정도로 오지랖 넓은 마리솔과 그를 이해하는 오랜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자살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오토는 우연히 마리솔이 두고 간 작은 용기에 담긴 음식을 먹어 봅니다. 그러고는 맛있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을 한 입 한 입 삼킵니다.

영화 “오토라는 남자”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소니픽처스코리아.영화 “오토라는 남자”의 한 장면. 사진 출처, 소니픽처스코리아.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열왕기상 19:4-8)

엘리야 선지자도 죽고 싶어 할 때가 있었습니다. 죽기를 원하며 쓰러져 있는 그에게 천사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내밀고 그를 어루만집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면, ‘아니 이왕 주실 시편 23 말씀처럼 잔치를 베푸시고 머리에 기름도 발라 단장도 시켜주시지. 힘든 사람에게 고작 딱딱한 구운 덩이와 물이라니요?’ 하고 따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소박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다시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시나요?

교회 이웃이 싸준 작은 용기에 담긴 김치 한 조각, 밥 한술에 엘리야를 어루만지신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요? 마치 마리솔이 건넨 엘살바도르 음식을 한 입 한 입 먹으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오또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작은 용기에 담긴 음식을 통해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말씀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권사님이 어깨를 두드려 주실 때, 그 손길을 통해 천사가 어루만지고 있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지날 ‘의지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김응선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1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더 읽기 원하시면,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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