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의 작품 중에 ‘해변의 묘지’라는 시가 있는 데, 마지막 부분에 매우 인상 깊은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구절입니다. 부는 바람에 삶의 의지가 생기는 경험을 아마도 시인은 그렇게 표현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은 순간에 어디선가 바람이 불면 잠시 멈추어 있던 사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죠. 머리가 희끗해질만큼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는데도 지나간 옛 기억에 마치 사춘기 소녀가 된 마냥 마음이 설레일때가 있습니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을 던지 듯 마음에 파장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젊음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나이가 먹고 나서야 깨닫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인생에 바람처럼 찾아온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더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누구에게나 다시 찾아온다는 겁니다. 물론 모두가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어느 등산가가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산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는데, 정작 자신은 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오르려고만 했지 산에 무엇이 있었는지, 수없이 지나치던 사람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산행이었다는 것이죠. 한평생 가족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만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밤샘을 밥먹듯이 해가며 열심히 돈을 모아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새 지칠대로 지쳐버린 육신은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족을 위해 모든 걸 감내했건만 돌아온건 무관심과 이제는 무용지물처럼 바라보는 냉소뿐 입니다. 사람은 얻고자 한 것을 얻지 못할 때 심한 좌절감을 갖게 됩니다. 믿었던 것이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극심한 박탈감이 몰려 옵니다. 한 때는 나를 움직이던 바람 같은 그 무언가가 저 멀리 사라지고 날 때 오는 고통입니다.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 공허한 순간입니다.
이처럼 허무한 시절을 지나가는 인생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람으로 다시 새롭게 거듭나라고 말이죠. 사실 지금껏 오르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이에게, 돈이라도 많이 벌어오면 가족이 행복해 질 것이라 믿었던 사람에게, 인생의 행복은 무언가 값어치 나가는 것을 더 많이 소유하는 성공적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던 이에게, 더 이상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충만한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영, 곧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인생이 우리를 진정 살게 하는 힘이라고 말이죠. 그 성령의 바람이 우리 안에 불어올 때, 우리도 살아있는 생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이 말씀은 폴 발레리의 시처럼 누군가의 절규같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모든 것이 허무한 순간,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 “정말 잘 살고 싶다” 절규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나요? 다시 추억하는 어느 한 순간으로 되돌아가 잃어버린 순수한 감정을 되찾고 싶었던 적 없으세요? 탐욕에 빠져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에게 떠오르는 건 아무 걱정없이 그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순수했던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바람이 이끄는대로 아들은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이제는 탐욕에 눈 먼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으로 가득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껏 누리지 못한 행운을 갑자기 가져다 주는 주문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서 갑자기 인생이 잘 풀린다는 만사형통의 의미도 아닙니다. 정말 살고 싶은 이유를 줍니다. 사는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거꾸로 열매를 보면서 나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얻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사는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 입니다.
글쓴이: 권혁인 목사, 버클리한인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5년 11월 30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