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그 안에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라

(편집자 주: 본 기사는 와싱톤 D.C.에 소재한 캐피톨힐 연합감리교회에서 열린 “Faithful Resistance” 집회 개회예배에서 라트렐 밀러 이스터링 감독이 전한 설교의 녹화 영상을 바탕으로 번역·정리한 것입니다. 번역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누락되거나 정확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전체 설교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라트렐 밀러 이스터링(LaTrelle Miller Easterling) 감독입니다. 저는 볼티모어-워싱턴(Baltimore-Washington) 연회와 페닌슐라-델라웨어(Peninsula-Delaware) 연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4편 1절부터 6절까지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시며 동시에 우리를 불러 세우시는 하나님, 제 입의 말과 우리 마음의 묵상이 주님 보시기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주님, 말씀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딸과 주님의 백성이 듣고 있습니다. 아멘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로다.”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로다.”

이 세상도 여호와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편 기자는 이 거룩한 선언을 속삭이지 않습니다. 협상하지도 않습니다. 머뭇거리거나 더듬지도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 말씀을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로다.”

모든 산과 모든 마을, 모든 바다와 모든 강어귀, 모든 나무와 풀잎, 모든 대륙과 별자리, 해와 달과 별들까지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것은 제국의 것도 아니고, 기업의 것도 아닙니다. 식민주의자들의 것도 아니고, 가부장제의 것도 아니며, 심지어 교회의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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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는 또 말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들과 세상과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바다 위에 세우시고, 물 위에 굳게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창조하시고, 다듬으시고, 건설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자이시며, 설계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 선언은 궁극적 충성을 요구하는 모든 국가 권력에 맞섭니다. 땅을 독점하는 모든 기업에 맞섭니다. 권력과 이익을 위해 땅을 빼앗으려 전쟁을 감행하는 모든 국가에 맞섭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정부도, 어떤 정권도, 어떤 시장 체제도, 어떤 지배적인 인종도 하나님만 소유하시는 것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민 제도를 통해 어떤 생명은 버려질 수 있고, 어떤 가족은 추방할 수 있으며, 어떤 나라는 경멸받아도 되고, 어떤 아이들은 구금될 수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식민주의자들이 그어 놓은 선을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자로 낙인찍을 수 있다고 결정한다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을 갈라놓고, 망명을 거부하며, 구금 시설을 세우고, 폭력과 기후 재난을 피해 도망친 사람들을 돌려보낼 때 우리는 마치 이 땅이 우리의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 재난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의 소비가 초래한 것임을 생각할 때, 이는 신학적·윤리적·도덕적 범죄(malfeasance)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우리가 소유에 대한 이단적(heretical) 이해에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풀어 보겠습니다.

카터 우드슨(Carter Woodson)의 「왜곡된 흑인 교육(The Miseducation of the Negro)」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교육 체계가 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기 인식을 길러주기보다 열등감과 의존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지만, 심리적으로는 식민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신학 교육에도 이와 유사한 위기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른바 ‘세례받은 이들의 잘못된 교육’을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는 소유의 본질과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위해 의도하신 뜻을 오해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땅을 가질 자격이 있고,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며, 어떤 나라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고귀하다고 믿도록 배워 왔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부와 가치의 위계를 정해 놓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식민화는 우리가 이민 정책을 정당화할 때 드러납니다. 그 정책은 부와 백인, 그리고 서구 여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면서 지구 남반구(Global South)의 흑인과 유색 인종을 범죄자로 취급합니다. 망명 신청자들을 침입자로 부르고, 난민들을 위협으로 묘사하며, 단지 모국어로 말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의심합니다. 합법적 절차를 따르려던 사람들이 법원 앞에서 체포되고, 그들의 처지는 제도의 문제보다 개인의 잘못인 것처럼 비난받습니다.

이것은 그저 나쁜 정치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쁜 신학입니다. 이 왜곡된 신학을 해체하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 세계를 관리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남을 배제하며 소유하고, 추방하며 지배하고, 영원히 빼앗으며 상속하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경제 안에서는 어느 가족도, 어느 나라도, 어느 기업도, 어느 인종도 다른 사람들이 부스러기로 연명하는 동안 터무니없는 부를 독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현 체제는 땅과 부와 권력과 안전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도록 만드는 동시에, 이민자와 난민, 그리고 망명 신청자들이 내쫓기고, 구금되며, 추방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이것은 21세기의 옷으로 치장한 바로(Pharaoh)의 신학입니다.

시편 24편은 우리에게 이 잘못된 신학에서 깨어나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를 것인가?”

성경은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가두는 정책에 서명하는 손을 가지고서 어떻게 그 손이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난민보다 불의를 더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서 어떻게 그 마음이 청결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안전과 거처와 존엄을 허락하지 않는 제도를 지지하면서 팔복을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취급합니다. 예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전쟁에서 이익을 얻고 그 전쟁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을 거부합니다. 예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의 이민 제도에는 자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일부 신학 전통들이 신앙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만 집중하게 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현수막에 적어 들고 경기장에서 흔드는 성경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러나 그 말씀은 개인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 곧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왔을 때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했고, 우리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월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Faithful Resistance: 이민 정의를 위한 공적 증언" 행사에서 연합감리교인들과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이 미 국회의사당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현수막을 잡고 있는 사람들 왼쪽부터) 미네르바 카르카뇨 감독, 라트렐 이스터링 감독, 신시아 무어-코이코이 감독. 사진, 마이크 두보스, 연합감리교뉴스.2월 25일 워싱턴에서 열린 "Faithful Resistance: 이민 정의를 위한 공적 증언" 행사에서 연합감리교인들과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이 미 국회의사당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현수막을 잡고 있는 사람들 왼쪽부터) 미네르바 카르카뇨 감독, 라트렐 이스터링 감독, 신시아 무어-코이코이 감독. 사진, 마이크 두보스, 연합감리교뉴스.

시편 24편에는 십계명과 산상수훈의 울림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권력과 부와 제국을 숭배할 때, 우리는 거짓된 것에 우리의 영혼을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군사적 힘과 시장 지배력, 그리고 인종적 위계질서와 국가적 예외주의로 우상들을 만들 때, 우리는 금송아지 앞에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이 여호와의 것이라면 땅은 전리품이 될 수 없습니다.

땅은 증언(testimony)이며, 언약(covenant)이고, 거룩한 신탁(sacred trust)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독교는 이 땅이 누구의 것인지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 나쁜 것은 기독교가 그것을 기억하고도 권력을 선택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은 다 내 것이다. 너희는 그저 나그네요, 이 땅의 세입자일 뿐이다.”

그러나 세입자는 폭군으로 바뀌었고, 나그네는 협박자가 되었으며, 선물을 탐욕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민 제도가 인간의 존엄보다 부를 보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그것은 구조적인 죄입니다. 비자가 투자자와 관광객에게는 쉽게 발급되지만, 농장 노동자들과 가사 노동자들, 그리고 난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결국 누가 중요하다고 믿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학자 윌리 제임스 제닝스(Willie James Jennings)는 식민지 시대의 기독교가 땅과 인종과 신학을 폭력적인 상상력 속에서 결합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는 기독교가 정복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소속의 복음(gospel of belonging)’을 ‘소유의 복음(gospel of possession)’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발견의 교리(Doctrine of Discovery)1’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이념 아래 사람들은 이 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강한 자와 승리자들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지배로 시작하지 않고, 축복으로 시작합니다. 가부장제가 아니라 공유된 소명으로 시작합니다. 정복이 아니라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경멸받는 이들, 모욕당하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과 동일시하지 않는 기독교 신학은 존재할 수 없으며,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서지 않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민권이나 서류나 비자나 여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시편 24편은 말씀합니다.

“그 가운데 사는 모든 이가 여호와의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나그네에 대해 끊임없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음이니라.”

예수께서는 국경을 넘으셨고, 폭력을 피해 피난하셨으며, 타인의 환대에 의지해 살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민족주의에 세례를 주었고, 우리는 배제를 성경으로 포장했으며, 벽을 세우고 그것을 지혜라 불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주민을 범죄자로 여기고 두려워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이주민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어떤 교회들은 이제 제단 위에 국기를 세우고, 예배 중에 충성 맹세를 낭독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56장 6-7절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미국 국기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나 구속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속한 자리입니다. 독수리2는 결코 십자가보다 더 높이 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 미국을 축복하소서”라고 말할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동시에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칠레를 축복하소서.
아르헨티나를 축복하소서.
우루과이를 축복하소서.
파라과이를 축복하소서.
볼리비아를 축복하소서.
페루를 축복하소서.
에콰도르를 축복하소서.
브라질을 축복하소서.
콜롬비아를 축복하소서.
베네수엘라를 축복하소서.
파나마를 축복하소서.
코스타리카를 축복하소서.
니카라과를 축복하소서.
온두라스를 축복하소서.
엘살바도르를 축복하소서.
과테말라를 축복하소서.
멕시코를 축복하소서.
쿠바를 축복하소서.
도미니카 공화국을 축복하소서.
자메이카를 축복하소서.
푸에르토리코를 축복하소서.
그리고 미국을 축복하소서.

우리가 이 “Faithful Resistance(신앙적 저항)”를 구현하기 위해 함께 모였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목소리로 더 이상 불의와 공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연합감리교회의 핵심입니다.

연하감리교회 사회원칙은 우리 교회가 이주민과 난민과 이민자를 환영하라고 촉구합니다.

주) 1. Doctrine of Discovery란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칙서 등을 통해, 기독교 탐험가들이 '발견'한 원주민 거주지를 기독교 국가의 영토로 주장하고, 비기독교인의 토지 소유권을 부정하고 원주민의 권리 박탈, 폭력, 토지 약탈을 정당화했으며, 미·캐나다 등 식민지 지배의 법적 근거가 된 주장이다. 또 Manifest Destiny란 19세기 미국이 북아메리카 서부로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하나님이 부여한 확고하고 자명한 사명이라는 신념이다. 이 사상은 미국의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며,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전파한다는 명분 아래 멕시코 전쟁, 하와이 합병 등 서부 개척을 가속화한 구호다. 

2. 미국과 로마제국의 상징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인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4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Top of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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