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14-18절

말씀을 나누기 전에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갈보리 교회가 속한 라리탄쇼어 지방(Raritan Shore District)의 7년 차 감리사입니다. 또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갈보리 교회 담임목사로 섬겼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5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다시 이 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부족한 사람을 설교자로 세워주신 한인총회 임원들과 문정웅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주제는 아마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설교했던, 어쩌면 다소 평범하고 뻔한 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주제가 매우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갈등’과 ‘분열’과 매우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섬겼던 두 교회 모두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교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전공이 교회 갈등 처리이고, 저 스스로를 교회 갈등 처리 전문 목회자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첫날 간식을 위한 구디백을 준비해주신 만모스 한인 교회는 제가 두 번째로 섬겼던 교회입니다. 약 6년 동안 그곳에서 사역했습니다. 교회에는 한인 회중 200여 명, 미국인 회중 100여 명이 있었는데, 두 회중 간의 갈등, 그리고 한인 회중 내의 갈등으로 인해, 제가 파송되었을 당시에는 한인 회중 50명, 미국인 회중 25명 정도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두 회중 모두 풀타임 담임 목사가 있었지만,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져 저 혼자 그 모든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에는 건축 비용으로 50만 달러의 빚이 있었는데, 원금은 갚지 못하고 이자만 내던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미국 교회를 섬기다가 2010년에 갈보리교회로 파송 받았습니다. 그때 갈보리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포함해 약 1,400명이 출석하던 교회였는데, 4년간 갈등을 겪으면서, 성인 250명, 어린이 150명 정도로 약 70%가 감소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한 그룹은 담임 목사를 지지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흔히, 목사파 혹은 줄여서 목파라고 불렀는데, 어떤 분들은 농담처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해서 목파라고도 부르곤 했습니다. 반대편에는 개혁파 혹은 줄여서 개파라고 불렀는데, 중간에 목사님 편에 섰다가 중재를 선다고 하다 개혁파로 돌아선 분들은 사람들이 농담으로 돌아온 개혁파, 줄여서 돌개파라고 불렀고,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라이 같은 개들이라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교회 안의 분위기가 그만큼 험악했음을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중립적인 분들, 방관자들도 있었습니다.

두루알리미 광고 박스 이미지 연합감리교뉴스에서 제공하는 주간 e-뉴스레터인 <두루알리미>를 받아보시려면, 지금 신청하세요.

갈보리교회 역시 건축을 진행하면서 약 500만 달러의 모기지를 지고 있었는데, 이전 교회 모기지의 정확히 10배가 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지금 시세로는 약 천만 달러에 달할 것입니다. 파송 받은지 2주 때 되는 주에 재정부에서 보고하기를 교회가 회복(turnaround)되지 않으면, 6개월 안에 파산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 교회의 갈등과 분열의 여파를 겪으며, 그동안 참 많이 기도했고, 연구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6년간 연회 교육의 한 과정인 ‘갈등 관리(Conflict Resolution)를 강의해 왔습니다.

그러던 중 2019년에 감리사로 파송을 받으면서, 이제는 교회 내 갈등에서 좀 벗어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열린 2019년 특별총회(Special General Conference)를 기점으로, 우리 연합감리교회(UMC) 전체가 갈등과 분열의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후 탈퇴(Disaffiliation) 과정이 이어졌고, 뉴저지 연회에서는 8개의 교회가 탈퇴를 결정했는데, 그중 5개가 한인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제가 바로 한인 감리사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다. 저는 진짜 할 말이 많습니다.

목사님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 여러분들, 갈등과 분열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다시, 그 “하나됨”이라는 주제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과 그 경험 속에서 이어진 사유와 말씀 묵상을 통해 저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하나됨’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세례 의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규정하던 모든 요소(인종, 국가, 계급  등)를 마치 배설물처럼 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가장 큰 무게를 둡니다. 세례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라고 고백하며, 서로를 형제와 자매라 부릅니다. 그 안에서는 인종과 민족, 사회적 지위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7-28)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표현에서 옷이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군인이 옷(제복)을 입어 자신의 사명을 드러내고, 성직자가 옷(예복)을 입어 자신의 소명을 나타내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 옷을 입음으로써 그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에베소서 2장 14-15절)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서로 적대적인 두 그룹 사이에 있던 벽을 허무시고, 그들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란 싸움과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벽이 허물어진 후, 하나님께서 “한 새 사람”을 지으셨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영어로는 “One new humanity” 즉, 새 인류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새 인류란 다름 아닌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루시는 화평입니다.

다시 말해, 여전히 우리는 다양한 정체성과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 그리스도 안에서 벽을 허물고 새롭게 지어진 새 인류, 그것이 바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화평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됨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1-3)

여기서 “부르심을 받은 일”은 “하나됨으로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부름에 합당하게 살라고 합니다. 하나됨의 과정이란 마치 우리가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내는 성화의 여정과도 같습니다. 본래는 결코 하나일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하나가 되었기에, 이제는 그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 바울은 이렇게 그 방법을 제시합니다.

우리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가 영어 성경에는 “Be completely humble and gentle…”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교회를 조금 다닌 분들은 겸손한 척하는 것을 참 잘합니다. 아… 저만 그런가요? 저희 어머니는 저를 너무 잘 아셔서, 목회 나가는 아들에게 이 세 가지를 부탁하셨습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내하라!(Be patient)”

이것이 바로 하나됨을 지켜내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공적인 담론에서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센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도 참 강합니다. 교단 분열의 과정을 겪는 동안에도, 정의의 열정에 사로잡힌 센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섬겼던 두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확신과 용기가 참 부러울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지나친 정의에 대한 헌신과 열기가 사회와 교회를 분열시키곤 합니다.

세상은 오늘도 막강한 힘으로 이루는 하나됨(Unity by overwhelming force) 혹은 탁월함으로 얻는 하나됨(Unity by excellence)을 말합니다.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하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은 나이브하다(naïve)라고 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면 이용당할 수 있다, 위험하다(dangerous)고 합니다.

정말 그런가요?

기독교 작가 마르바 던(Marva Dawn)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다른 구조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요한 사회적 구조가 될 것이며, 그 패턴은 '혁명적 복종'을 통한 '창조적 변혁'의 패턴입니다. 따라서 권세들은 파괴되지도 않고, ’기독교화’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길들여질’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서로에 대한 혁명적 복종은 완전히 겸손하라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이렇게 겸손히 복종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바로 우리의 차이점들 속에서 창조적 변혁이 일어납니다. 나를 나로 만들던 힘, 즉 내 인종, 민족, 사회적 계급, 심지어 나의 정의 개념은 교회 안에서는 파괴거나 단순히 "기독교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안에서 길들여진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사람이 부들부들해 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님처럼, 유순한 양같이 끌려가지만, 그 안에는 세상이 흔들 수 없는 내공이 있는 것이지요.

교회가 다양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된 통일 공동체를 지향할 수 있던 것은 스스로를 낮추고, 약함과 섬김의 자세로 타인들을 대하는 공동체적 겸손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겸손한 사람들이 많아질 때, 교회 안에서 강함의 논리를 가졌던 사람들이 점점 그 힘을 잃고 무력화됩니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을 길들여 왔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중환자실에서 자신의 어머님을 돌보다가 쓴 글입니다.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작은 방, 중환자 가족 대기실. 지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지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서로에게 짜증보다는 서로를 더 배려한다. 사람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한 할아버지가 이웃에게 고장 난 자전거를 샀다. 그리고 수리를 해서 탈 수 있는 자전거가 되었다. 갑자기 이웃 아줌마가 다시 돌려 달라고 했다. 수리비를 2만 원을 더 주면 돌려준다고 했단다. 주네 안주네 서로 실랑이 하다가 쓰러져 지금 병원에 누워 있단다…  할머니 말씀하시길, “그눔의 2만원 때문에…”

또 다른 사연. 집 키를 두고 나온 할아버지, 할머니. 열쇠 수리공을 부르면 1만 오천 원, 그 돈을 아끼려고 사다리 타고 2층 베란다에 오르다 떨어져서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하시길..” 그눔의 만 오천 원 아끼려고…

서로 사연을 나눌 때마다 한숨과 웃음도 함께 나눈다. 왜 서로를 더 많이 배려하려고 할까? 우리는 “공통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 힘없이 누워있는 약한 사람들이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을 한 가족으로 묶어 주고 있다.

그래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이 서로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강함은 나의 벽은 견고히 세우고, 상대방의 벽은 강제로 부수기에 강함은 다툼이다. 하지만 약함은 누구의 벽도 강제로 허물지 않는다. 약함은 자신의 벽을 스스로 허물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나를 주고,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내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강할 때가 아니라 약할 때 사람은 서로를 품는다. 약함은 서로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다. 약함은 오히려 당신은 나의 가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약함 안에서 서로의 힘이 되어주고, 웃음이 되어주고, 눈물이 되어 준다.

그렇습니다. 약함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질 때, 우리는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강해지면, 그 강함 속에서 우리 자신만 드러나게 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적을 만들게 됩니다. 혁명적 순종이야말로 가장 성서적인 갈등과 분열의 해독제입니다.

세상은 양극화의 극단을 치닫고 있고, 2025년 10월 1일, 지금 이 시대를 보면, 미국과 한국 모두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적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이 분열의 한복판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만일 미국 내 한인 교회들이 하나됨을 이룬다면, 우리는 전쟁의 한복판에 해방구를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대립의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교회 안에서 우리가 겸손해지고, 시원한 성령의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면, 결코 우리는 나이브하지도 않고, 이용당하지도 않을 것이며, 반대로 세상을 길들이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위험한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50주년을 맞이하는 갈보리 교회 위에, 그리고 이 교회의 미래 위에, 약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자리에 참석한 한인총회 평신도 지도자들과 목사님 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의 교회, 약함 속에서 강함을 드러내는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제 다음의 글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을 더 많이 신뢰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적은 것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 약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아니다. 이렇게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경험하고 그 힘에 우리를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창립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힘을 해체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은혜의 뿌리다.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힘이 일어난다면, 그만큼 성령님과 하나님의 권위는 뒤로 물러설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직 한가지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  -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연합감리교뉴스에 연락 또는 문의를 원하시면, 한국/아시아 뉴스 디렉터인 김응선(Thomas E. Kim) 목사에게 이메일 [email protected] 또는 전화 615-742-5409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연합감리교뉴스를 받아 보기를 원하시면, 무료 주간 전자신문 두루알리미를 신청해 주세요.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is an agency of The United Methodist Church

©2025 United Methodist Communication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