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나요?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인데 어째서 고난이 끊이지 않는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우리는 가끔 이런 한탄을 듣곤 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선행의 정도에 따라 공정하게 상벌을 내리셔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그렇지 않다. 악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반면에, 선한 사람은 큰 복을 받아야 하는데 선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고난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욥이다. 욥은 하나님에게서 동방의 의인이란 평가를 받을 만큼 완벽한 사람인데 인간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적어도 욥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고난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러니 너무나 불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분이십니까? 왜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이 주는 대답은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고 사람이 고난 받는 것은 그가 선한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선한 사람에게 내리는 고난의 부당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인간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한다. 정말 선한 사람, 덜 선한 사람, 조금 악한 사람, 정말 악한 사람 등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잘해보았자 상대적이다. 우리들끼리 경쟁해서 우열을 가려서 선악을 구분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이 될 수 없다. 객관적으로 선악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진정 우리가 인간의 선함을 논하기를 원한다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어떤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특히 우리 중에 정말로 선한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로마서 3:10-12절과 전도서 7:20절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사람도 당연히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주시는가?"에 대해 성경이 주는 두 번째 대답은 그런 고난을 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경고가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 눈에 선하게 보이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느껴지는 그 사람이 재난을 당할 때, 나는 하나님의 불공평성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이런 보고를 했다. 빌라도 총독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선한 갈릴리 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해서 그들이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충분히 그런 종류의 일들이 일어나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어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누군가 부실공사를 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무고한 사람들 18명이 돌무더기에 치어서 죽었는데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비극을 당한 줄로 생각하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와 같이 망하게 될 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시각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선한 사람들은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한다는 시각에서, 우리 중에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적어도 하나님의 판단기준으로) 누군가에게 복이 내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라고 보는 시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재난이 내리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복이 내리는 것이 이상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특별 배려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특히 내 눈에 선하게 보이는 사람에게 재난이 닥칠 때, 우리는 그것을 불공평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도 그런 종류의 재난을 당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어여삐 여기셔서 도리어 복을 주신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나아가 나에게 회개할 것이 없는지를 살피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에게 닥치는 고난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서 오는 고난으로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죽이는 목적이 있다. 또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고난으로 사람을 단련시키고 궁극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목적이 있다. 야고보서 1: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절대 사람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지 않는가?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100세 때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주셨다. 그렇다면 성경의 이 두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 "시험"이란 단어는 "유혹"(temptation)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마치 사탄이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는 것같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유혹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테스트의 성격이 있다. 마치 선생님이 학생을 테스트할 때 그 목적이 학생을 좌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테스트를 통해 그가 다음 단계로 성장하도록 돕는 목적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테스트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7절에서는 이 테스트의 과정을 용광로 속의 "연단"의 이미지를 빌어 설명한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따라서 "선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고난의 문제를 접할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해치기 위해 시험/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숙을 위해 테스트/시련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고난을 대면할 때, 그 고난은 우리에게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귀한 정련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글쓴이: 홍삼열 목사, 산타클라라연합감리교회 CA
올린날: 2013년 8월 27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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