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끼던 후배 목사님이 심장마비로 일주일 전에 갑작스레 소천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존재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어느새 잊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다 친척이나 지인의 죽음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한 성도의 어머니께서 지난 주에 한국에서 암 제거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요즘은 의학의 발전으로 많이 극복되고 있지만, '암'이라는 말은 여전히 우리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죽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그 분과 잠시 얘기 나누면서, 이번 기회가 그 분과 어머니에게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음을 들었습니다. 바쁘고 분주하게 살던 삶을 잠시 멈추고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다 보면, 분주한 일들에 가려져 안보이던 인생의 소중한 부분들이 보다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장례식을 주례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장례식은 고인이 남은 자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사는 존재가 아님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압니다. 그러나 일상의 분주함 때문에 쉽게 놓칩니다. 그런데 장례식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그 중요한 진리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세상에 많은 석학들과 종교의 창시자들이 귀한 진리를 말하지만, 예수님의 특별한 점은 '생명'을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귀한 진리나 삶의 교훈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성경의 촛점은 '생명'입니다. 일반적 생명 개념보다 훨씬 크고 깊기에, 예수님은 '영생' 혹은 '풍성한 삶'이라고 하십니다(요한 3:16, 10:10). "하나님을 믿는다"함은 그 분 안에 있는 "영생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영생을 맛본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까지도 기꺼이 감당한 것은 당연한 선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을 새로운 각오로 살아갑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그분의 기쁨이 '나의 살아가는 이유이고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이유를 가지고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선교'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생존'을 위해 사는 보통사람들보다 더욱 강열하게 살게 됩니다.
사람들의 평균 연령을 고려한다면 얼마나 더 사실까요? 보통사람들에게는 '죽음'까지의 남은 기간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그 기간은 '우리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그래서 설렘으로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그동안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합니다. 열심히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고 생명을 전합니다. 그리고 부르실 때 신나게 나아갑니다.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글쓴이: 조현준 목사, 앤아버한인연합감리교회 MI
올린날: 2013년 11월 7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