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순간이 다가올 때

일 년 동안 같이 살던 큰 아들이 지난 주 타 주로 이사 갔다. 좀 더 나은 직장을 구해 갔으니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데 별로 기쁘지가 않다. 자식이 자라서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줄 알면서도 아들과 함께 살면서 나눈 행복을 더 이상 맛볼 수 없으니 마음이 허전하다. 먼 곳으로 이사한 것도 아니기에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겠지만 아들과 함께 한 집에서 같이 살 기회는 이제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아들의 떠남을 이별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만 마음이 쓸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아들이 잘 되어 떠난 것도 섭섭한데 60년 만에 만났다가 헤어진 남북 이산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 보나마나 이산가족들을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만났다가 또 다시 헤어지는 슬픔을 경험한 그들은 기가 막힐 것이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가족이 수십 년 동안 헤어졌다 만났으니 본인들이 원하면 어느 곳에서든지 같이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데 남북한 정권이 허락하지 않는다. 서신을 주고받거나 전화 통화도 할 수 없다. 이념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할까?

최근에 서울 송파구의 반 지하 주택에서 살던 세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인 아주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봉투에 넣어놓고 말이다. 이들이 세 살던 집 주인은 9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고 다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날 수 있느냐고 속상해 한다. 그 동안 집세나 공과금을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기에 이 세 모녀는 동반 자살을 했을까? 다른 가족, 친구들, 그리고 세를 살던 집 주인은 세상을 떠난 이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삶을 마감하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한 순간이라도 더 오래 살고 싶어한다. 나이가 몇 살이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을 빨리 떠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어지는 순간이 늦게 오길 원한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생자필멸(生者必滅) 이라는 말도 있지만 죽음을 통한 이별은 모든 사람들을 슬프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면 슬픈 이별을 지혜롭게 맞는 방법은 없을까?

지난 주 감동적인 책 한 권을 읽었다. 염창환, 송진선씨가 쓴 “치유의 밥상”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 호스피스 병동에서 만난 스물아홉 명의 환자들과 나눈 이야기를 담았다. 인생의 종착역 도착 직전의 이야기들이라 슬프고, 애처롭고, 안타까워 종종 눈가를 닦아야 책을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나는 왜 건강하고 그들보다 오래 살고 있을까? 그들을 대신해서 “왜 세상은 이렇게 공평하지 못하느냐”고 소리라도 외쳐야 덜 미안할 것 같다.

흥미로운 사실은 절망, 분노,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의 종점에 다다른 사람들이 병이 그리고 죽음이 나쁜 것만은 아님을 발견한다. 때로는 호스피스 환자들이 이별을 앞두고 서로 화해하고 용서한다. 미워했던 사람들이 사랑을 고백하며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다. 누가 보아도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현실이 때로는 복으로 변할 수 있음을 깨닫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호스피스 환자들이 경험하고 감사의 마음을 갖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6-7) 바울에게는 죽음은 슬픈 이별이 아니었다. 가슴 설레는 일이고 기다리던 순간이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사순절은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 전 주일을 뺀 40일 동안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40일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에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머물렀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지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40일 동안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고 그 분이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을 기다린다. 제자들은 예수와의 이별이 슬펐지만 스승의 부활을 목격했고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신비를 배운다.

모든 사람들은 이별을 경험한다. 일시적인 이별도 있지만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도 있다. 비록 지금 암환자처럼 의학적인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다고 해도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다. 이와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이별이라면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인간을 만든 분이 죽음과 이별도 주셨다면 이것도 우리에게 주신 복이 아닐까? 나의 이별이 언제 오든 후회하지 않도록 행복한 추억을 만들며 열심히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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