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팔십이 되신 교우의 팔순(八旬) 잔치가 있었다. 지난주에는 팔십팔 세가 되신 교우의 미수연(米壽宴)이 있었다. 작년에는 보스턴 지역에 사는 분의 백수연(白壽宴)에도 참석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생일을 맞이하는 것이 반갑지 않을 것이다. 생일을 되면 일 년이 지나서 그만큼 더 늙었다는 뜻이니 반가울 리 없다. 그러나 장수하는 부모님을 둔 자녀들은 이런 복된 날을 맞아 부모님의 장수를 축하하며 가족들, 가까운 친지들, 그리고 이웃들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싶어 한다.
이런 잔치에는 주인공이 살아온 날들 중에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의 사진들을 모아 만든 동영상을 보여주기 마련이다. 수십 년 전에 부부가 만나 결혼한 사진을 비롯해서 어린 자녀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 지낸 행복한 순간의 사진들을 보면 축하하러 온 사람들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잔치의 주인공도 자녀들이 만든 동영상을 보면서 자신의 삶에 저렇게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었음을 새롭게 깨닫고 감사할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면 좀 더 신경을 써서 지난날의 추억을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만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요즘처럼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새삼스럽게 무슨 잔치를 하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다. 옛날에는 육십이 되면 환갑잔치를 했다. 요즈음은 환갑이 되어 잔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육십이 되는 분을 위한 깜짝 파티를 교우들이 준비한 적이 있다. 그 때 당사자는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얼마나 당황하고 화를 내는지 모른다. 본인은 환갑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교우들이 그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처럼 되어 당사자가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한국인들은 돌잔치를 성대하게 한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은 생일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초대할 친구 명단을 만들고 어디서 어떻게 잔치할 것인가 오래 전부터 계획을 세운다. 나라에는 국경일이 있고 기업이나 사회단체는 처음 시작된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한다.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때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이나 시작하도록 도운 분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는다면 무척 의미 있는 날이 될 것이다. 신앙인은 절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념하고, 축하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닐까?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떠났을 때 남은 가족들과 친구, 친지들의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장례식에서 고인들의 사진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저 사진들을 본인이 살았을 때 같이 보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일찍 떠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동영상은 만들지 못해도 사진첩이라도 종종 펴보며 살아야겠다.
일리노이주에 사는 금년 96세인 후레드 스토브(Fred Stobaugh)씨는 지난 4월에 아내를 잃었다. 몇 주 후에 그는 음반회사에서 작사 혹은 작곡 콘테스트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아내를 그리는 가사를 만들어 보냈다. 음반회사는 이 분이 보낸 시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제목이 "Oh Sweet Lorraine" 이다. Lorraine 은 물론 1938년에 처음 만나 75년 동안 사랑했던 아내의 이름이다. 그는 I wish I could do the good times all over again (그 좋았던 시절을 다시 반복하고 싶다)"고 그리움을 드러냈다.
살다 보면 좋은 순간보다는 어려운 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어려움은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지금 당장은 숨쉬기조차 어려울 수 있다. 기억할 것은 폭풍우가 지나면 해가 뜬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좋았던 시절"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오나? 비록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위로부터 주시는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ellipsis;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5-39). 이렇게 말하는 바울은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전혀 없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조로운 순간을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순간에도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신 분이 지켜보고 있다면 결코 우리를 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어 학생들과 부모들이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끔찍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지금이 "그 좋았던 시절"일지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다.
글쓴이: 김용환 목사, 북부보스턴한인교회 MA
올린날: 2013년 9월 6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