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담긴 이야기들

저는 어려서는 우표를, 조금 커서는 동전을 수집했습니다. 지금은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가치가 나가는 동전들은 욕심 많은 막냇동생이 오래 전에 이미 골라가지고 간 것 같고 우표는 아무도 욕심내지 않아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는 간간히 십자가를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작년에 여행을 갔는데 모처럼 마음먹고 십자가를 사려고 했다가 아내가 "그렇게 살지는 않고 십자가를 수집한다는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난센스다."라고 시비를 거는 바람에 그 이후 기분이 상해서 십자가 수집이 주춤해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모아놓은 십자가들은 대부분 사연이 있습니다. 제 사무실에 걸려있는 십자가들 가운데 바보 예수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얼굴이 너무도 기운 없고 어수룩해 보이는 십자가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엉성하게 생기셔서 볼 때마다 웃었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친근감이 갑니다. 언제인가 내가 "예수님, 참 바보처럼 생기셨네요."했더니 그분이 나에게 "너도 별볼일 없는 바보면서&ellipsis;"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이후 자세히 들여다보니 예수님이 우셨는지 십자가 윗부분에 알지 못할 물 자국이 뚜렷하게 들어났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물 자국이 있으면 가끔 사람들이 병 치료 받는 기적의 십자가로 여기는 것처럼 나도 동네방네 알려 돈도 좀 벌겠는데 얼굴은 아니고 십자가 윗부분입니다. 상품가치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일 많은 돈을 투자해서 표구를 한 것은 구세군 자선 센터에서 $1에 산 벼 지푸라기로 만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마른 볏단으로 만들고 십자가는 수수 깡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아마 하나밖에 없는 가장 가치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십자가일지 모릅니다. 이사 다니느라 여기저기 벼가 빠져서 허술하게 되어버렸기에 왠지 너무 미안해서 거금을 들여 멋있게 표구를 했습니다. 수수깡 십자가에 달린 벼 지푸라기 예수님은 볼 때마다 왠지 나를 부끄럽게 하면서도 친근감을 줍니다.

내 마음을 가장 찔리게 하는 것은 중남미 아이티에 단기선교 갔다가 3불에 산 가시면류관 쓰신 예수님 얼굴입니다. 우리 일행이 머물렀던 선교 센터 바깥에는 항상 외국인들에게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길가에서 하루 종일 우리를 기다리다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면 달려와 우리가 좋아할 만한 특산물들을 내놓습니다. 그 가운데 내 눈을 사로잡은 단단한 나무를 깎아서 만든 정말 잘 만들어진 예수님 얼굴이 있었습니다. 사려고 했더니 미국인 선교사가 며칠만 기다리면 1불로 가격이 내려갈 테니 그때 사라고 해서 떠나는 날 3불에 산 예수님입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아파하는 얼굴인데 선교지에 가서 가난한 장사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도둑질을 한 증거물인 것 같아 지금도 예수님의 얼굴을 볼 때마다 미안합니다. "네가 이 물건을 미국에서 샀으면 3불 줬겠느냐? 그냥 달라는 30불 다 주었을 텐데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도둑놈 심보로 깎아서 사도 되는 거니?"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민중예수 십자가 판화도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린 분이 한국의 옛날 허리 부러지게 농사를 해도 땅 주인에게 다 바치고 굶어야 했던 소작농의 모습이라고도 하고, 동학혁명 녹두장군 전봉준이라고도 합니다. 정말 민중 예수의 모델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알 길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십자가를 보면 정말 열심히 사람답게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일깨워주는 십자가입니다.

백두산 십자가도 있습니다. 1995년 우리 민족의 희년을 맞이하면서 제가 북에 들어가 당시 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용순선생과 오랜 만남 끝에 허락을 받고 제작해 온 백두산 나무로 만든 십자가입니다. '백두산 희년" 또는 "평양 희년"이란 금색 글씨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해방50주년 희년을 맞아 3만개를 만들어 한국 교회협의회를 통해 만 오천 미국 이민교회에 만 오천 분배했던 참으로 의미 있는 십자가입니다. 이 일을 해내느라 빨갱이란 소리도 들었고 별일이 많았었습니다. 그렇지만 6.25 이후 북한에서 최초로 십자가 제작을 제가 해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했습니다.

교인들이 여행선물로 준 예루살렘 십자가, 로마 십자가, 러시아십자가, 쎌틱십자가 등 귀한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즘 제 앞에 있는 것은 브라질에서 교인이 구해준 가시면류관 쓰신 예수님인데 가시가 너무도 날카롭고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 모습이 너무도 현실적입니다. 모든 십자가에는 우리가 삶 가운데서 만나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사랑의 십자가, 생명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해방의 십자가, 평화와 통일의 십자가, 이 땅에는 물론 우리들의 삶 속에 주님의 십자가가 높이 들려져야 하는 계절입니다.

글쓴이: 김정호 목사, 아틀란타한인교회 GA
올린날: 2013년 3월 29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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