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속으로 끝내도 좋은 것

이 세상에서 서둘러서 좋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미흡하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그 동안 수고했던 모든 것들이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비록 미흡하더라도 빨리 끝내야 좋을 때도 있습니다. 손자병법 작전 편에는 그것이 바로 전쟁이라 하였습니다. 전쟁은 졸속이라 할지라도 빨리 끝내라는 것입니다. 솜씨 있게 싸운다 해도 오래 끌게 되면 불리해 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초 유럽을 제패했던 나폴레옹도 열강과의 연속적인 전쟁에 휘말려 결국은 패망하고야 맙니다.

이처럼 아무리 이기는 전쟁을 하더라도, 하나의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들이기 쉬우므로, 오래된 싸움은 종국적인 실패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다소 무리가 있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속전속결로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 (1339-1453년)은 결국 아귀테에느에서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지만, 백 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된 전란으로 두 나라 국민의 경제적 손실과 인명피해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전쟁 기간 동안 두 나라는 모두 농민 반란과 흑사병으로 이중 삼중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만일 이때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측이 좀 더 현명했다면 이와 같은 장기간의 걸친 소모전은 피하고 양국에 서로 이득이 될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요즘은 창과 칼은 손에 없지만 다른 부류의 전쟁들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모두들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고, 사회의 구성으로 함께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런 삶에서 다툼은 꼭 발생합니다. 이런 싸움들 가운데는 어처구니 없이 발생하는 것도 있지만, 각기 옳은 주장들을 가지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남기 위한 경쟁 속의 싸움이라도, 혹은 양편 모두 옳은 뜻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싸움은 졸속으로라도 빨리 끝내는 것이 역시 좋다는 결론을 내려봅니다.

보통 갈라서서 자신에게 "의"가 있다고 말하는 경우, 어떤 것이 그의 "의" 이든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의" 였던가요? 자기가 옳다고 말하는 의를 관철시키기 위한 의가 아니라, 자기가 속한 그룹을 더욱 잘 되게 하기 위한 "의" 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다툼이 길어지게 될 때, 그것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기가 이롭게 하고자 했던 그 그룹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면, 자기가 주장하는 "의"를 내려 놓거나 다음으로 미룰 줄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대립은 본래 의도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랜 싸움에서는 이긴다고 한들 실상은 진 것이고, 자신 조차도 본래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자리에서 방황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의 다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을 때에, 부모와 자녀간에 오해가 있을 때에, 형제간에 불화가 있을 때에도 역시 싸움은 오래가면 모두 패자가 될 뿐입니다. 자기가 옳다면, 자기의 뜻을 기어코 관철시키고자 하다 보면, 너무 그 일에 몰입하는 나머지 주변의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일을 양보했을 때 잃어버리는 것보다 갑절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니, 비록 종국에 상대방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내어도, 잃은 것은 훨씬 더 많은 것이지요. 바야흐로, 물질도 잃어버리고, 사람도 잃어버리고, 시간도, 에너지도, 미래의 다른 가능성도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대부분 졸속으로 끝나서 좋을 것들은 없지만, 싸움만큼은 발생한다면 졸속으로라도 끝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비록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전하고 하는 바를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싸움으로 인해 다른 정말 필요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현실이 싸워야만 하는 현실이라고 한다면, 졸속으로라도 끝내는 방법이 사실은 얻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 보니 사역 초창기 예루살렘에 가셔서는 안식일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언쟁하고 말씀의 본뜻을 설명하며 대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기 때는 저들의 공격에 반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라는 자리까지도 침묵으로 답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언쟁과 논리로 바리새인들의 행각을 질타하고 바꾸시려 했다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선택은 그 모든 것들을 아주 빠르게 종식 시키신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십자가는 패자의 자리였습니다. 졸속으로 끝낸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오히려 승리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낭비가 하나도 없는, 그러면서도 정말로 필요한 생명을 얻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십자가라는 자기 희생과 죽음의 자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양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양보함으로 비록 다툼이 있을 때에 졸속으로라도 끝내놓는 것입니다. 당장은 손해이고, 당장은 억울한 느낌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이긴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전쟁을 하고도 계속 버틴 정권이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졸속으로라도 끝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러면 오히려 얻게 되시는 것이 훨씬 더 많으실 것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글쓴이: 박성준 목사, 달라스임마누엘연합감리교회 TX
올린날: 2013년 5월 22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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